테니스 1편: 빌리 진상 킹
대체로 운동에 빠져든 이야기들에는 극적인 반전이 있다. 완전한 운동싫어 인간이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운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요것도 하게 됐다거나, 몸이 너무 약해서 맨날 픽픽 쓰러졌는데 어느날 어떤 운동을 만나고 근육짱짱맨이 됐다거나, 운동이라면 질색팔색을 해서 집에만 쳐박혀 있다가 큰 병을 얻어 각성을 하면서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거나 하는.
당연하다. 원래 운동을 좋아했거나 원래 운동에 재능이 많아서 어릴 때부터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사람이 계속해서 운동을 하는 이야기를 누가 듣고 싶어하겠는가. 사람들은 드라마를 좋아한다. 요랬는데? 요래됐음다!는 시대정신이다.(아님)
그리고 무엇보다 그토록 운동싫어 인간이 어쩌다 이토록 운동열정 인간이 되었는지 그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적 서사를 접하고 싶은 게 또한 독자들의 니즈일 터이니, 나도 그럼 그 이야기를 해보겠다.
그러나 일단 먼저 알려둘 것은, 나 역시 요랬는데? 요래됐음다!의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제는 운동좋아 인간’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여전히 확신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운동이 ‘좋다’는 감정에는 긍정할 수 있지만, 운동을 하기까지 궁댕이가 가볍게 일으켜지는 행위 역시 ‘좋다’ 혹은 ‘기꺼이 시행된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어쩌다 운동을 하게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순전히 고양이 때문이었다.
뭐라고? 고양이가? 운동을? 시켰어?
거의 그렇다고 볼 수 있다. 2018년부터 나는 우연한 기회에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밥엄마 노릇을 하고 있었다. 멍멍이와 동네 공원을 산책하다가 길고양이를 만났고 하루이틀 밥을 주다가 아파트 고양이들에게도 밥을 주고 윗동의 캣할머니의 부탁을 받아 대리 밥주기도 해주고 이녀석 저녀석 고양이들과 친해지고 단골 고양이손님들이 많아지면서 고정된 밥자리가 생기고 하는… 뭐 그런 흔한 캣맘의 삶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하필 고정된 밥자리가 아파트 테니스장 옆이었다.
설마, 그래서 테니스를 치게 됐다는 소린 아니겠지?
설마는 늘 사람 잡는다. 고양이 밥 주러 자꾸 테니스장에 가다 보니, 거기서 테니스를 치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되고, 자꾸 보니까 재밌어보였다. 마침 레슨도 한다고 한다. 그렇게 뚜벅뚜벅 테니스장으로 걸어들어가 라켓을 들고 코치님이 던져주는 공을 후려쳤다. 물론 나는 하루에 움직이는 시간이 3분도 되지 않으며 하루의 대부분을 누워서 보내는 낙지, 아니 거의 실내불가사리 같은 존재로서 계단을 2개만 올라도 숨이 차서 헉헉대는 인간이라는 점을 일러두어야겠다.
테니스 라켓과 공이 만나는 순간 그토록 엄청난 힘이 가해진다는 사실을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나. 날아오는 공을 받아치면 되겠지,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라켓을 휘둘렀는데 공이 라켓면에 닿으면서 엄청난 진동이 느껴졌다. 앗 시발 큰일났다. 손목이 아작나겠는데.
실제로 손목이 아작났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테니스를 치면서 손목이 아작날 수는 없다. 라켓은 손목으로 휘두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내가 ‘테니스를 치다가 이렇게 됐다’고 하자 의사는 매우 비웃으면서 “제대로 못치니까 손목이 나가죠”라고 했다. 하, 니가 몰알아!
의사는 다 안다. 그는 스포츠외상 전문가였고, 그의 말대로 나는 어깨와 몸통의 회전력으로 라켓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손목을 꺾어서 경첩을 접듯이 치고 있었다.
코치님은 매일 매우 답답한 표정으로 “손목을 접지 말고 라켓을 휘둘러! 공을 밀어!”라고 외쳤다. 아니 손목을 접지 않고 어떻게 라켓이 공을 때리지? 예전에 즐겨보던 배드민턴 경기에서는 손목 스냅으로 휙 휙 셔틀콕을 띄웠다 꽂았다 하던데. 문제는 테니스는 배드민턴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래 나도 안다. 근데 진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어느 날인가부터 코치님의 말수가 줄었다는 게 느껴졌다. 그냥 해맑게 웃으며 레슨볼을 던져줄 뿐이었다. 뭔가 기분이 좋아보이기도 했다.
“테니스 선수 누구 좋아해요?”
“세레나 윌리엄스!”
“와하하 그래! 세레나 윌리엄스처럼 쳐보자!”
이러면서 흥을 돋구는데, 그러니까 이것은 모든 것을 포기한 지도자가 지도의 의지를 내려놓고 ‘그래 니가 즐거우면 됐다’의 경지에 이르른 것 같았다. 공을 좌우로 던져줄 테니 달려서 받아보라고 했는데 한 세 번쯤 반복하고 내가 “코치님 앙데 난 앙데요 먼저가 제발 그만 말도 앙데 죽여줘 못해요 으악” 하며 엄살을 부리자 또 해맑은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차고는 다시는 그런 걸 시키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스탭도 넘어가고, 스윙 교정도 그냥 넘어가고, 그냥 매일 날아오는 레슨볼을 내 맘대로 쳤다.
나는 진짜 어처구니 없이 테니스를 못쳤다.
모든 운동이 다 그렇지만 테니스는 특히 자세가 중요한데 자세가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스윙과 임팩트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로 잘할 수 없는 운동이다. 몇 달간의 레슨을 받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손목을 접으며 배드민턴을 치듯이 테니스를 쳤다. 매 레슨마다 평균 2-3개의 공을 코트 밖으로 내던졌다. 테니스를 치는 건지 야구 배트를 휘두르는 건지 모르겠다. 코치님은 어느 순간부터 나의 자세를 교정해주려는 의지를 놓아버린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안 고쳐지는 애도 드물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 뭐 선수할 것도 아닌데 그만하면 됐다.(지금 생각하니 코치님 마음이 정말로 이해가 된다)
근데 이상하게 재미는 있었다. 어떤 점이? 글쎄, 그냥 내가 몸을 움직이고 있다는 자체가 “재밌다!” 방바닥에 찰싹 달라붙은 불가사리가 시간 맞춰 코트에 나와서 뭔가 제대로 된 스포츠 종목을 ‘배우고(?)’ 있다는 사실! 놀랍잖아? 당연히 주위 친구들과 가족들도 모두 놀랐다. 니가? 운동을? 테니스를? 그거 엄청 힘든 거 아니야? 헹! 나도 이제 운동하는 사람이다! 나도 너희들의 운동라이프 수다에 끼워달란 말이야!
어쩐지 금방이라도 건강짱짱맨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테니스가 결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운동이라는 걸, 그래서 파트너가 없으면 오래 지속할 수 없는 운동이라는 걸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