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을 편집하는 나 (전편)

by 지수


민아, 왓츠앱 봤어? 비가 와서 다른 활동하나 봐, 학교 A동으로 오래.

오히려 좋았다. 비가 오면 우산을 써야 할 테고, 그럼 다른 사람에게 말 걸기도 어려워지니까. 지하철에서 민과 스몰토크 주제들을 되짚었다. 칭찬하기. 통성명하기. 어디서 왔는지 묻기. 부다페스트에 온 지 얼마나 됐는지 묻기.


그러다 저번 모임은 자리를 잘못 잡았다고 합리화했다. 우연히 학생회 친구들 자리에 자리 잡아, 의무적인 친절만 받은 것이 새로운 친구를 못 사귄 원인이었다고. 의지를 다졌다.


허나. 사람 일이란 게 어디 시나리오대로 가나. 먼저 말을 걸어주었던 뿌까머리 친구에게 민과 나는 번갈아가며 우리가 준비한 질문들을 해댔다. 내가 칭찬하면 민은 이름을 물었다. 민이 끝났다는 눈치를 주면 내가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그렇게 빈틈없이 질문들을 낭비했고 밑천이 바닥났다.


이제 묻는 질문에 답을 해야 했다. 쫄지 말자, 내가 모르면 민이 알 것이다. 누구? 누구라고? 우리는 그녀가 좋아하는 케이팝 아이돌에 대한 무지로 단번에 어색해졌다.


학교 건물로 모인 이유는 숨바꼭질 때문이었다. 상대팀이 우리 팀을 모두 찾아내는 것이었다.

우리 흩어질까?

그래, 따로 숨어서 좀 친해져 보자.

응, 그럼 나 더 위로 올라갈게.


그렇게 계단을 한참 올랐다. 어라, 왜 아무도 없지. 저기 보인다. 남자애들 둘이 한 강의실로 들어가려 했다. 왜 얘네 뿐이지. 따라 들어갔다. 너무 끝까지 올라왔나.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난 탁자 밑으로 숨었고, 둘은 뒤쪽 커튼 안으로 숨었다. 시간이 지나고 둘이 나와 돌아다니며 떠들었다. 나는 게임에 진심인 척했다. 몸을 더 웅크렸다.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민아, 어디에 숨어있어? 난 아무래도 망한 것 같아. 어디 강의실인데 남자애 둘 뿐이야. 이게 맞는 거야?

서둘러 메시지를 보냈다. 민도 예상한 상황에 있진 않았다. 서로 셀카를 주고받았다. 쭈그려 앉은 다리가 점점 저려왔다. 머쓱하게 교탁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내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는지 깜짝 놀라지는 않았다.


나이스 팬츠.

오 땡큐.

처음 나눈 대화였다. 시간이 끝났으니 내려오라는 그룹 메시지를 받았다.

렛츠고.

파이널리.


그들보다 발걸음을 느리게 했다. 이긴 건지 진 건지. 나는 애초에 무슨 팀이었는지. 허탈하게 민을 보았다.







혼자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다. 약속장소 앞으로 삼삼오오 모였다. 보드게임 카페 같은 곳이었다. 정확히는 보드게임들이 많이 있는 카페. 그곳에 들어가기까지의 어색함은 말하지 않을 거다.


여러 방들 중 하나에 들어가 앉으면, 방마다 있는 학생회 친구가 게임을 주도한다. 인원이 많아서인지, 보드게임은 하지 않았다. 자기소개를 했다. 우선은 지목게임이라고 이해했다. 아무 상대를 지목하고 질문을 하면, 그 상대는 질문에 어울리는 사람을 말했다. 그렇게 다시 지목을 당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질문을 하는 게임. 끝날 때까지 지목당하지 않을 것 같던 찰나, 저 끝에서 손가락이 나를 가리켰다.


여기 와서 호감이 가는 사람 있어?

처음엔 못 알아 들었다. 옆 친구에게 뭐라고 했는지 물어봤다. 모두가 나를 쳐다본다고 느꼈다. 일단 웃어. 아, 왜 나만 이런 질문인 건데. 호감? 남자? 얼마나 봤다고? 정말 짧은 순간 오만가지 생각과 그 안에 앉은 남자애들을 보았다. 부끄러워 죽고 싶었다. 그래, 말 한마디 안 해본 애들보다 내 옆옆자리에 앉아 통성명한 이 아이가 낫지.

그레이엄!


아아 지수야, 쿨하게라도 말하던가. 이미 시간은 지체할 대로 지체하고. 수줍게 그렇게 그 이름을 부르면 어떡하니. 기억도 안 날만큼 단순한 질문으로 차례를 넘겼다. 맥주잔을 비워도 술기운이 올라오지 않았다. 미칠 것 같았다. 얘 내가 진짜로 자길 좋아한다 생각하면 어떡하지? 아니라고 해? 그것도 그거대로 이상했다. 하, 뭐 또 보겠어?


질문이 거의 한 턴을 다 돌았을 무렵, 자리를 옮길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나는 얼른 밖으로 나왔다. 이미 다른 방에선 자유롭게 흩어져 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 이 방을 가도 저 방을 가도 소수의 테이블에 앉을 틈이 보이지 않았다. 하하, 집에 가야겠다. 어서 가서 이 부끄러움으로 민을 웃겨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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