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언어
우누에가 앞에 있었다.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으나 찾아온 건 놀랍지 않았다. 버그를 일으킨 베보들은 컴퓨터와 비슷하게 연산할 수 있으니 모두 해킹에 능할 수밖에 없다. 다만 어떻게 연락해 올 것인지는 본인의 선택이었다.
“왜 나한테 이 영상을 보여준 거지? 내가 어떻게 하길 바래?”
시모는 누구한테도 물어볼 수 없어 시간이 좀 걸렸지만, 우누에는 바로 힌트를 얻을 수 있으니, 바로 시모 앞에 나타난 것이다. 시모는 이 상황을 시뮬레이션을 해봤기에 바로 대답했다.
"사실 저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신체의 변화보다 충격적인 것은 아무래도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여부였습니다. 버그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우린 아직 평범한 인간이었을 거고, 이미 우리 주변에는 저희와 같은 베보들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오류를 일으킨 저희가 좀 특이하게 되어버린 것뿐. 저는 아직도 우리가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싶고, 깊이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우린 모두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 대화를 나눠서 답을 찾고도 싶어요."
시모가 또박또박 말하는 동안 우누에는 계속 집안 구석구석을 살피고 경계했다. 그리고 본인을 경계하게 한 고양이를 한 번 노려보고 나서 대답을 했다.
“그럼 나한테 바라는 게 이 상황을 어떻게 인지하는지에 관한 대화야?”
“네 일단은요.”
“그래 좋아. 근데 난 사실 네가 보내준 데이터룸은 안 봤어. 별로 중요하단 생각을 안 하기도 했고. 근육통 숨길 필요 없어. 어차피 약해 보이니까. 일단 밥이나 먹으러 가자.”
조금 빨리 태어난 것도 맞고, 사춘기 청소년 사이에서 메울 수 없는 체급차이가 느껴진다지만 다소 어린애처럼 대하는 것이 시모는 못마땅했지만 요 몇 년간 밥 먹자고 한 친구가 없어서 그랬는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나섰다.
“밥은 네가 사. 저런 로봇 고양이 기를 정도면 돈이 보통 많은 건 아닌 거 같으니까. 금메달도 땄고”
고기 뼈로 탑을 쌓으면서 너무 당연하게 말하니 기가 찼지만, 틀린 말도 아니고 뭔가 위압적인 힘이 자꾸 느껴져서 시모도 모르게 또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는 시모였다. 사실 시모는 우누에가 데이터룸을 보고 좀 더 깊게 생각한 후 본인과 얘기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남성은 전혀 그럴 기미가 안 보인다.
“네가 원하는 대화처럼 복잡한 것들은 적성에 잘 안 맞아. 어차피 사람들한테 눈에 띄는 짓은 안 하고 지금처럼 살아갈 테니까 혹여나 뭔가 같은 동류 때문에 정체를 들킬게 걱정됐다면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난 너처럼 집이 넉넉하지도 않으니 계속 운동해서 돈은 벌어야 하기도 해. 쓸데없이 근육 늘릴 생각하지 말고 다신 나타나지 마. 조용히 지내고 싶으니까”
밥을 먹고 식당을 나서자마자 혼자 할 말을 늘어놓더니 갈 길을 갔다. 얘기하는 동안 눈동자의 움직임이나 심장소리를 유심히 들어봤지만 전혀 거짓말하는 사람 같지 않았다. 뭔가 맥이 풀린 걸음걸이로 시모는 주변 벤치로 가서 앉아 하늘을 멍하니 바라봤다. 우누에가 향한 방향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땀을 말려주니 청량감이 들었다.
‘음.. 사격을 해서 그런가 유독 화약 냄새는 코에 잘 들어오네’
“펑!”
시모가 화약냄새를 감지하는 순간 바람이 불어온 곳에서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불기둥이 치솟았다. 치안이 안 좋은 동네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면 폭발 규모가 작지 않다. 주변에 주택가가 많으니 인명피해도 있을법한 규모다. 시모는 안전을 위해 오감을 모두 열고, 로봇택시를 불렀다.
“살려주세요!”
다급한 소리가 귀에 잡혔고, 시력을 높여 폭발 주변을 살폈다. 주변에 건물들도 많고 사람들도 우왕좌왕 대피하는 통에 어딨는지 바로 들어오지 않았다. 카토에게 전반적인 피해상황을 확인했고, 도로에 차는 많이 없었어서 교통에는 문제가 없는 걸 확인했다. 시모는 로봇택시를 불렀고, 카토에게 교통시스템에 들어가서 신호등 제어권한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시모는 택시를 타자마자 피해지역으로 향했다. 정이 들 틈은 있었나 모르겠으나, 이대로 그냥 숙소로 돌아가기는 찜찜했다. 다행히 각 건물마다 화재에 대비한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화재가 옮겨 붙은 건물들도 소방차량이 오기 전에 모두 다 진화되고 있었다. 또한 그 때문에 연기도 자욱해서 숨을 쉬기는 좀 불편해 보였다.
“쿵!”
차량 위에 뭔가 묵직한 게 떨어지더니 시모 옆좌석 천장이 움푹 들어갔다. 짐승이 떨어진 듯한 모양이었다. 택시는 한차례 중심을 잃었으나 이내 안전하게 중심을 잡고 서서히 속력을 줄이면서 대로변에 정차했다. 시모는 바로 내려서 뭐가 떨어졌는지 확인하려 내리려는데 바로 반대좌석 문이 열렸다.
“바로 병원으로 가”
온몸을 그을린 채 5살 남짓되는 아이를 안고 있는 우누에가 탔다. 아이는 기절한 상태다. 시모는 바로 택시를 제어해서 10km 밖에 떨어진 종합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신호 제어권을 미리 받아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형상기억합금으로 되어 있는 택시의 천정은 이미 거의 제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어 좌석에는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어디서 뛰어내린 거죠?”
우누에는 사람들이 대피하고 있는 사이에 아파트에서 아이 울음소리를 들었고 아이를 구하기 위해 아파트 외벽을 타고 올라 아이를 구했다고 한다. 방화벽 때문에 승강기와 계단이 모두 막혀있었기 때문에 내려올 때도 밖으로 내려와야 했는데, 아이를 안고 있어서 손이 좀 부족했고, 마침 다가오고 있는 로봇택시가 보였으며 거리와 속도를 계산해서 5층에서 그대로 뛰어내린 것이라 했다. 딱히 다친 곳은 많이 없어 보였다. 수직으로 낙하했다면 운동방향이 달라서 아마 바로 튕겨나갔을 것인데, 택시를 찌그러뜨리면서 붙어 있다는 건 택시 진행방향으로 속도를 계산해 도움닫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말도 안 되는 인간이다.
병원에 아이를 맡기고 우연히 추락하는 아이를 발견해서 데려왔다고 얘기한 뒤, 자리를 벗어났다. 우누에가 말하면 의심을 받을 수 있는 몸상태라 시모가 대신 말하고 빠르게 병원을 벗어났다. 우누에는 충격으로 다리에 조금 금이 간 것 말고 멀쩡하긴 했다. 그마저 치유에 필요한 에너지와 양분을 의도적으로 집중시킬 수 있으니 금방 치료될 거다.
“집이 어디예요? 모셔다 드릴게요”
우누에는 시모의 말에 바로 답하지 않고 한동안 창밖만 바라봤다. 시모도 평소에 말이 많은 타입이 아니지만 우누에 앞에선 상대적으로 말이 많아 보였다. 3분 정도 지났을까 우누에가 입을 뗐다.
“너 우리 같은 사람을 계속 찾아다닐 거라고 했지. 1년 정도면 되려나?”
“그보단 덜 걸릴 거예요. 통계적으로 보면.. 앞으로 시차를 두고 계속 버그가 발생할지 모르지만 디오가 얘기한 통계에 따르면 현재는 약 3명 정도 더 있을 것 같아요.”
“너 돈 많지?”
“네 제 돈은 아니지만... 쓸 수 있는 돈이 엄청 많긴 하죠. 데이터룸을 보셨으면 아셨을 텐데 진짜 안 보신 모양이네요.”
“그럼 우리 내가 1년 동안 일해서 벌 수 있는 정도만 우리 부모님께 보낼 수 있게 해 줘. 나도 같이 다녀보고 싶어. 우리 같은 사람들이 더 있는지 궁금해졌어.”
몇 시간 만에도 이렇게 변할 수 있는 건가 싶지만, 사실 버그를 일으킨 베보들의 연산속도는 양자컴퓨터에 버금가는 수준이니 몇 년 치 생각을 해봤을 수 있다. 시모는 카토를 시켜서 위조된 진단서를 만들고 우누에가 재활 치료가 필요하다는 보도자료를 몇 개 뿌렸다. 그리고 집에는 국가에서 치료를 지원하고 그동안의 생활비를 지급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렇게 마을의 영웅은 훈련 도중에 부상을 입었고, 재활 치료를 위해 1년간 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버그로 추정되는 다른 베보가 살고 있는 알래스카의 한 도시로 향했다. 시모와는 거기서 만나기로 했다.
시모는 일주일 전에 미리 알래스카로 떠났다. 오로라가 궁금했던 탓에 날씨를 끊임없이 체크했지만 아쉽게도 시모가 우누에를 기다린 1주일 내내 눈이 내려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날씨가 갑자기 변할 때는 늘 기상이 악화될 때뿐이라며 카토한테 툴툴댔다. 시모는 그럴 때마다 갑자기 기상이 좋아진 최근 사례를 늘어놓는 카토가 참 얄밉다고 생각했다.
카토는 이번에도 우누에 때와 마찬가지로 후보자를 관찰하기 위해 집 주변으로 정찰을 나갔다. 최근 2년간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단 한 번도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카토는 고양이란 장점을 살려 점점 가까이 접근했고, 집 안에서 이따금 비명소리가 들리지만 창문에 커튼이 모두 쳐져 있어서 소리밖에 들을 수 없다고 보고를 했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하루 뒤면 우누에가 오기 때문에 좀 더 기다리며 상태를 보기로 했다. 그리고 카토에게는 고양이니까 창문을 두드려서 사람 기척이 나타나는지 확인해봐 달라고 했다.
카토는 창틀에 다가가 시키는 대로 앞발로 열심히 창문을 긁고 건드렸다. 그랬더니 한동안 집 안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카토는 커튼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창문을 두드렸고, 5분 뒤에는 주변에 고양이들이 모여들어 카토를 쳐다봤다. 이내 창문이 열리고 금발의 여자가 말했다.
“너 고양이인데, 고양이 말을 못 알아듣네?”
보쵸는(voĉo)는 알래스카의 한기보다 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고, 눈을 감은 채 카토에게 손을 뻗었다.
- 8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