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
“로비 말고 들어가서 얘기를 더 해야 하지 않겠어? 경찰을 부를까 조금 고민이 되는데”
우누에는 이미 밥을 먹으면서 대화를 다 듣고 있었다. 시모도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았지만 보쵸의 눈치를 살폈다. 눈을 감고 있어서 표정을 읽기가 힘든 것도 있었지만 목소리에서 어떤 당황한 기색도 없었다.
“어제 들린 짐승 같은 목소리는 어디로 갔나 했는데, 역시 다 듣고 계셨네요.”
보쵸는 건조하게 대답했고, 그로 인해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셋은 방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더 이어갔다. 보쵸는 어릴 때 부모에게 당한 학대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사별한 알코올중독 아버지, 그리고 언젠가 나타나 어머니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된 동거인. 이 둘은 수시로 다퉜고 화풀이 대상은 보쵸였다. 보쵸가 겁에 질려 울기 시작하면 술에 취한 아버지는 꼴 보기 싫다며 보쵸를 때렸다. 어느 날은 맞고 넘어지면서 테이블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혔는데, 그때 큰 출혈이 있었고 시신경이 망가졌다고 한다. 아버지는 은 채굴장에서 일하며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왔고, 보쵸의 치료비로 쓰라고 생활비를 줬다. 그리고 그 돈을 동거인은 새로운 남자를 만나는데 다 썼다. 보쵸는 그렇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시력을 다 잃어 갔는데, 계단을 제대로 보지 못해 계단에서 구르면서 하반신 마비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런 얘기를 감정 없이 차가운 공기를 담아 얘기하는 보쵸였다. 그 후 보쵸가 얘기하고 지낼 것은 맹인보조견으로 나라에서 파견해 준 리트리버 한 마리와 집 주변을 돌아다니는 고양이, 그리고 새들 뿐이었다. 어차피 사람들하고 할 말은 없으니 이들과 교감하다 보니 눈이 완전히 실명되던 해에 고양이 언어를 습득하게 되고, 다른 동물들과도 차츰 대화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모두 소리를 분석해 가며 들을 수 있는 능력 덕분이었다. 보쵸는 이때부터 자신을 학대한 부모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고, 마비 독을 가진 뱀에게 명령하여 부모 둘이 걸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보쵸를 괴롭히던 둘은 지하실에 갇히게 됐다. 괴롭힘에 취미는 없었고, 본인을 학대한 그 기간만큼 딱 10년 동안 똑같은 지옥에 살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소설과 영화에서나 볼법한 스토리였고, 흔히 말하는 사이코패스적 성향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시모와 우누에는 실제로 얘기를 해보니 어떤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아 이상했다.
“동물들로 우리를 공격할 수도 있지 않았나?”
“야생 동물은 그들의 사회에서 충분히 생존을 위한 폭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폭력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들에게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어떤 것도 명령하지 않아요. 자연스럽지 못한 것들은 또 다른 폭력을 낳기 마련이죠. 아마 제가 여러분들 말처럼 버그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폭력은 온전히 저한테만 향하고 끝났겠죠. 그런데 저 또한 부자연스러운 각성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지하실에 있는 둘에게 폭력을 가한 것이 아니었을까.. 어제 생각해 봤습니다. 시모님, 이건 당신이 찾는 것에 대한 대답 중 하나일 수 있을까요?”
시모와 우누에는 처음으로 보쵸가 말하는 소리의 파장이 달라졌다고 느꼈다. 시모는 조금씩 안도하기 시작했다. 본인이 복수에 사용하고 있는 분노와 기억을 마치 다른 인격에 묻어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으나, 다중인격은 어찌 보면 인간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유형으로 버그를 일으켰다는 사실만 뺀다면 인간다움과 멀어지진 않는다. 공기의 온도가 바뀌자 시모는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그럼 앞으로 약 8년 정도는 더 복수를 위해 그들을 가둬둘 생각인가요? 그동안에 당신은 뭘 하실 건가요? 지금처럼 계속 의료 기록을 바꿔가며 집에 계실 건가요?”
“그걸 제가 당신들한테 얘기해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동물원에 취직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 눈과 다리로 그걸 할 수 있을 리 없으니 일단 현재를 유지하며 생각해 봐야겠죠.”
세계에서 단 세 명만 아는 사실을 공유하는 사이지만, 그렇다고 하루도 안되어 친해질 수는 없었다. 보쵸는 대화가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했고, 택시를 불러 집으로 돌아갔다. 시모는 보쵸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자연스럽지 못한 것들이 낳는 또 다른 폭력’
시모는 이게 마치 베보가 탄생하게 된 배경과 같다고 생각했다. 디오가 막고자 했던 '프로젝트: 가이아' 이걸 디오는 폭력이라 정의했고, 그 결과물이 시모를 비롯한 베보들이니 말이다.
‘우리는 인위적이었지만, 인간다움을 추구하도록 만들어졌으니 폭력과 먼 것인가, 버그를 일으킨 누군가 태생적으로 폭력적인 성향을 띠면 어떻게 되는 거지’
실제로 베보 중에는 자라온 환경에 따라 주변 친구를 따돌리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레코드가 이미 있었다. 그들 중에 버그를 일으켰다고 보이는 사람이 없는 것이 버그 후보자를 탐색할 때 가장 다행스러운 점이었다. 그런데 또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특히나 지금 보쵸의 상황은 위험하다. 실제로 그 집에서 생산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잔고는 지속적으로 줄고 있다. 의료 기록을 유지하기 위해 실제와 같은 결제 기록도 계속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남은 잔고 유지 기간이 1년 남짓이다. 여기서 보쵸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범죄연장선상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게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라고 시모는 생각했다. 우누에나 시모나 보쵸는 장기이식에 비교적 자유롭다. 죽은 장기를 되살릴 순 없지만, 이식에 적합한 장기를 찾을 필요 없이 잘 융화될 수 있게 조직을 조금 조작해 주면 된다. 그러니 돈만 있으면 다시 앞을 볼 수도 걸을 수도 있다. 보쵸가 코너에 몰릴수록 혹은 동물원에서 일하고 싶은데 그게 신체적인 허들로 미뤄진다고 생각이 들 때 그녀가 할 선택이 무엇일지는 장담할 수 없다.
“위험한 거 같죠?”
시모는 우누에도 본인과 똑같이 생각해 줄 거라 믿고 한 마디 건넸다.
“뭐가? 돈은 충분하다며, 같이 움직이고 싶으면 설득해 봐. 난 복잡하게 그녀의 인생에 개입할 생각은 없어. 다음 행선지 어딘지 확정되면 알려줘.”
우누에는 무심하게 대답하고 호텔 체육관으로 가버렸고, 생각이 많아지는 만큼 배가 빨리 고파졌기 때문에 시모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밥을 먹으면서 시모는 디오의 영상을 머릿속에서 재생했다. 그리고 본인이 지금 보쵸를 현재의 상황에서 끄집어내고 싶은 마음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단서를 찾으려 애썼다. 제시간에 나온 식사가 멍 때리는 것처럼 보이는 시모 앞에서 차갑게 식어갔다.
그 시각 카토는 열심히 다른 후보들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는데, 유력한 한 명이 자살을 하면서 다음 행선지에 대한 수정이 필요해졌다. 카토는 사춘기를 넘긴 베보의 범위를 조금 더 넓혀서 탐색을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자살한 베보에 대한 조사도 시작했다. 베보를 탐색하는 방식은 디오가 이미 설계해 둔 것이었기 때문에 시모는 처음 탐색을 요청한 이후 추가적으로 뭔가를 덧붙이지 않아도 되었다.
약 19년의 기간 동안 베보는 약 5천만 명 정도 태어났다. 그리고 최근 3년 간은 이 프로젝트가 목적을 거의 이룬 듯 세계 인구가 평형에 다가가 연간 태어나는 베보 숫자가 크게 줄었다. 디오가 영상에서 밝힌 버그의 확률은 천만분의 일 정도였는데 사춘기를 맞이한 것으로 추정되는 4천만 명을 조사했을 때 놀랍게도 그 확률에 근접했었다. 앞으로 천만명 정도가 아직 사춘기에 접어들지 않았기 때문에 확률적으로 1-2명 정도 버그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으나, 현재로는 버그가 더 없을 가능성도 있었다.
시모는 20여분의 생각을 끝내고 보쵸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연산하는 양이 보통 사람의 몇십 배가 되기 때문에 생긴 것과 다르게 식사량도 엄청나다. 우누에도 처음 식사할 때 본인보다 많이 먹는 약골은 처음 본다고 할 정도였다. 약 5인분 정도의 식사를 마치고 시모는 렌터카를 몰아 호텔을 나섰다. 우누에는 호텔 체육관 창문을 통해 이동하는 시모를 지켜봤고 한숨과 함께 이마에 주름을 한 번 만들더니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보쵸는 돌아가는 길에 시모가 보내준 영상에 딸려온 데이터룸도 일부 확인했다. 모두 확인하고 싶었지만, 눈으로 봐야만 하는 것들은 디오는 정말 똑똑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감출 수 없었다. 현재까지는 그가 설계한 대로 모든 것이 흘러갔기 때문이다. ‘프로젝트:가이아’도 확실히 막았고, 그의 설계대로 세이고상 수상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공감되는 것은 그가 느꼈던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이 본인과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재밌는 사람들을 만났다는 사실에 옅은 미소를 띠고 돌아갔다. 그렇게 집에 돌아오고 나니 허전함이 밀려오는 보쵸였다. 문득 어릴 때 기억이 스쳤다. 어머니가 돌아가기 전까지 행복했던 아버지와의 추억도 들어오고, 이제 우연이란 걸 알았지만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에메랄드빛을 띠던 어머니와 눈 색깔이 똑같았던 것도 뭉클하게 다가왔다. 이제 머릿속에서 기억을 평생 끄집어낼 수 있지만 그때 찍었던 사진을 다시 보고 싶어 숨죽여 오열했다. 보쵸의 친구인 커다란 리트리버가 와서 보쵸에게 얼굴을 부비며 위로했다. 그렇게 10분 정도 지났을 때, 시모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볼 수 없으니 메시지는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친구들이 동물 밖에 없으면서 동물원에 취직하고 싶다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홀로그램으로 충분히 대체할 수 있을 테니 같이 동물원을 없애러 가고 싶으시다면 눈과 발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동물들이 풀려날 때 뭐라고 하는지 저희한테도 알려주시겠어요?”
보쵸에게는 시모가 확실한 인간처럼 느껴졌다.
“내일까지 생각해 보고 답장하겠습니다.”
보쵸는 지하실의 잠금장치를 일주일 뒤에 오픈되게 만들었다. 지하실은 사람이 쾌적하게 살아갈 모든 걸 갖추고 있었다. 다만 매일 시신경에 미치는 독이 있는 버섯을 먹고 있어 앞을 볼 수 없고, 5m 내로 가까워지면 전기가 흐르는 발찌를 차고 있어 이따금씩 비명소리는 들린다. 생각보다는 무른 복수였지만 이게 보쵸에게는 최선이었던 것 같다. 둘의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도 없었고, 적응한 이후로는 청결도 유지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2년 가까이 이런 생활을 했으니 물론 정신은 많이 피폐해져 있지만 보쵸가 겪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보쵸는 남은 잔고를 털어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주문했다. 이제 안 볼 사람들이니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보호자가 없는 미성년자는 어디든 돌아다니기 힘드니 신상정보를 해킹해서 나이를 스무 살로 바꾸고, 그간의 의료기록과 교육기관에서 발급한 생활기록부를 조작했다. 태어난 병원에서 발급하는 오프라인 출생기록증이 없어 한 결 간편했다. 보쵸는 범죄에 연루되지만 않는다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동물원을 없애러 간다는 소녀가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보쵸의 마음은 가벼웠다.
우누에는 3시간의 운동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사료더미에 파묻힌 카토는 아직 다음 행선지를 찾고 있었다. 카토는 에너지원을 고양이가 먹을 수 있는 음식들로 할 수 있는 효율 좋은 로봇이다. 다만 시모와 마찬가지로 일을 많이 하면 많이 먹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은 죽어버린 후보자 때문에 일을 멈출 수 없어 저 모양이다. 우누에는 카토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보지 않기 때문에 아직 그 일을 알지 못하고, 시모가 단순히 어려운 일을 지시했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면서 한 편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시모를 걱정하며 샤워실로 향했다. 그리고 샤워를 하고 있을 때 시모에게서 전화가 울렸다. 우누에는 경이로운 속도로 나와서 폰을 집었다.
“빨리 이거 보세요!”
시모는 우누에에게 화려한 오로라를 보여줬다. 알래스카에 온 뒤로 늘 날씨가 안 좋았는데, 처음으로 좋아진 날이었다. 시모는 저녁이 되길 기다렸고, 밥을 먹자마자 오로라가 잘 보인다는 스팟으로 간 것이었다. 보쵸에게 갔다고 생각한 우누에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지만, 오로라가 펼쳐지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봤다. 일반적으로 구름이 있으면 오로라를 볼 수 없는데, 정말 얇게 펼쳐져 있었는지 초록색 오로라가 퍼졌다. 처음엔 스포이드로 잉크를 떨어뜨리듯 한 점에 오로라가 보이더니 펼쳐져 나갔다. 시모와 우누에는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비행기에서 보면 더 예쁘다고 하던데, 3일 뒤에 시간 맞춰서 여길 떠나는 걸로 하시죠”
시모는 들떠서 떠들었고, 우누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화면에 얼굴을 처박았다. 짧은 시간에 정식적으로 많은 성숙을 요구받은 친구들이지만 어쩔 수 없는 소년들이었다.
다음 날, 보쵸는 앞으로 함께 여행할 때 본인에게 필요한 것들을 시모에게 보내며 동행하겠다고 연락했다. 시모는 카토에게 충격적인 보고를 받았기에 잠시 멍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다음 루트를 짰다. 세계에서 가장 큰 동물원은 미국 샌디에이고에 있으니 일단 행선지는 그쪽으로 잡고 카토에게는 베보 시설 중에서 가장 큰 양자컴퓨터를 가지고 있는 서버를 이용해 해킹할 수 있는 준비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옴베이에 유서가 남아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한 번 시도는 해봐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버그를 일으킨 베보가 자살한 거라면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건 이 여행의 목적에 매우 중요한 단서기 때문이다.
이틀 뒤 약속된 시간에 보쵸가 강아지 훈도(hundo)와 함께 도착했다. 시모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전용기를 하나 구매했다. 알래스카로 오는 길은 구름이 가득했지만, 샌디에이고로 가는 창밖에는 경이로운 광경의 오로라가 또 펼쳐졌다. 우누에는 충분히 확대가능한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 한동안 창문에 붙어있었다.
아직 시모는 본인이 인간인지 아닌지 확실한 답을 내리지 못했지만, 이들과 함께하다 보면 이 여행을 끝낼 때 즈음 알 수 있을 막연한 희망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10분 단위로 우누에를 물려고 덤비는 훈도와 그걸 한 번도 제지하지 않는 보쵸, 보쵸가 명령하고 있다고 신경질 내는 우누에, 우누에 말에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보쵸를 보며 저들은 분명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시모다.
2084년 12월 19일. 세 명이 첫 프로젝트를 위해 샌디에이고 공항에 도착했다. 그곳에선 작은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고도 당신들이 인간이에요?”
- 10화 끝, 1부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