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 Oct 06. 2020

이제는 외모 규제하지 말아요.

안녕 애들아!     


오늘은 학교 내 외모 규제에 대해 샘의 생각을 솔직히 말해볼까 해요. 아직도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외모 규제를 명기한 규정이 있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대충 여론 조사를 하면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외모 규제에 반대한다는 것 잘 알고 있어요. 물론 소수의 학생들은 학업 집중, 모방 심리 등을 이유로 찬성하기도 하더라고요. 샘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교직 생활을 거듭할수록 규제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이 커져갔고, 지금은 오히려 반교육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고민을 거듭할수록 확신이 커지는 몇 안 되는 주제 중 하나예요. 물론 샘의 경험들이 한몫했지요.     


샘이 신규 교사일 때는 외모 규제가 강했는데, 당시에는 사실 별 생각이 없었고, 막연히 학습 분위기 유지와 공동체 생활을 위해 적절한 규제는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내 학창 시절이 그러했듯이. 하지만 외모 규제가 엄격한 중학교에 있으면서 교사 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점점 하락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담임을 하면서 하루 종일 아이들의 외모에 신경을 놓을 수가 없었죠. 당시에 여학생들은 색조 화장, 눈 화장이 금지되어 단속의 대상이었고, 남녀 학생 모두 두발 길이의 제한은 없었으나 파마와 염색이 일절 금지였죠. 여기에 추가로 교복 조끼 대신 맨투맨 입는 것, 실내에서 운동화 신는 것 등이 단속의 대상이었지요. 이때는 학생을 보면 머리, 상의, 신발을 차례로 보는 게 습관이 되었죠.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외모 단속에 많은 에너지를 할애했고 점점 지쳐했어요.      


사실 샘 학창 시절에 비하면 규정이 많이 완화된 거긴 해요. 여학생은 귀밑 3cm 단발머리만 가능했고, 남학생은 2cm 정도의 군인 스타일의 스포츠머리만 허용됐죠. 엄청 옛날 얘기처럼 들리죠? 불과 15년 전 샘 학창 시절이에요. 라떼는 말이야(ㅎ) 지금 남학생들의 평범한 바가지 머리는 꿈도 못 꿨고 반항의 상징이었어요. 샘도 약간 반항하면서 머리를 길렀는데, 외모 불량으로 학생부에서 몇 번 맞기도 했어요. 그리고 졸업 사진 찍기 전날 머리 가운데를 바리깡으로 고속도로 내는 것도 경험했지요. 다음 날 머리를 다시 스포츠로 자르고 사진을 찍은 기억이 나네요.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참 규제가 없어 보이죠? 우리나라가 민주주의와 인권 개념이 확장되면서 학교 사회도 발맞춰 변해갔어요.      


출처 - 민중의소리


하지만 샘 신규 때도 정도만 달랐지 외모 기준은 분명히 존재했고, 학생들에게 기준을 들이대며 실랑이하는 날이 많았죠. 화장을 지적할수록 여학생들과 묘한 금이 가기 시작했고, 살갑던 남학생들도 머리를 건들면 등을 돌리기 시작했어요. 더 큰 문제는 외모 규제가 소위 말하는 ‘생활 지도’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고, 진정한 생활 지도라고 할 수 있는 학업, 진로, 교우관계 상담 등 학생 성장을 위한 상담은 위축되기 시작했어요. 외모 규제가 진정한 ‘생활 지도’를 위한 에너지를 분명 갉아먹고 있었어요. 둘 다 챙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활 지도를 위한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었어요. 외모 규제는 진정한 생활지도를 위한 시간을 빼앗았고, 심지어 표면적 외모에 집착하면서 아이와의 깊은 신뢰 관계(래포, rapport)를 흔드는 악영향까지 줬죠. 또 다른 문제점은 나도 모르게 외모로 아이를 낙인찍는 버릇이 스며들었어요. 학생을 투명하게 보고 성장을 도와야 할 교사의 시선이 왜곡될 수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어요. 신규 교사 때 진한 화장으로 많이 싸웠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아이 외모를 바라볼수록 편견만 커져갔죠. 하지만 학기 말에 아이의 진면목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고, 이런 측면들을 좀 더 격려하고 칭찬하지 못한 채 졸업시킨 게 못내 후회가 되었어요. 사실 결정적으로 샘이 놀란 경험이 있어요. 외모 규제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 주말에 서울 시내를 걷고 있었는데,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교복 입은 학생들을 보고 나도 모르게 ‘저런 XXXX’라고 나지막이 내뱉고 화들짝 놀란 적이 있어요. 대화도 나눠본 적 없는 학생들인데 그 순간 나에겐 적어도 천하의 ‘쓰레기’ 학생이었던 거예요. 사실 서울은 두발 자유화가 된 학교가 늘어나면서 거리에 조금씩 볼 수 있는 풍경이었는데도 말이죠. 나도 모르게 나온 정말 심한 욕에 깜짝 놀랐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크게 자성을 했죠. 그해 말 지친 나를 돌아보며, 외모 규제를 더 이상 학생들을 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생활 지도’로 인정하지 않고, 진정한 ‘생활 지도’에 침범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조용히 다짐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고등학교로 자리를 이동했는데 확실히 외모 규제가 덜했어요. 초등학교 때까지 자유롭다가 왜 중학교만 유독 외모 규제가 심해질까 아직도 미스터리예요. 고등학교는 입시 문제가 워낙 압도적이어서 외모 규제가 어부지리로 밀려났다는 현실적인 파악도 되었지만, 어쨌든 생활 지도에서 외모를 언급하는 비율이 크게 줄어들어 만족스러웠어요. 아이들과의 관계 형성도 전보다 훨씬 좋아졌고, 무엇보다 성장과 회복, 진로 탐색이라는 진짜 생활 지도에만 집중할 수 있었어요. 아이들도 중학교에 비해 외모 실랑이가 줄자 샘께 마음의 문을 열고 관계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걸 느낄 수 있었죠.      


그러던 중 우연히 인근 공립 혁신학교에 연수차 방문하게 되었는데, 외모 규제에 대한 샘 생각이 더욱 분명해진 계기가 되었어요. 이 학교는 학교 문화의 전반적인 혁신으로 유명한 학교였어요. 특히 수업의 경우, 모든 반 책상의 기본 배열이 조별 모임 형태였고, 교사의 일방적인 강의식 수업이 아닌 협동 학습과 프로젝트 수업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었어요. 과정중심 평가가 이뤄졌고 집단 지성을 신뢰하도록 유도했죠. 덕분에 생기부 내용도 풍성해 대학 진학률도 좋아 지역 사회에서 화제였죠. 이보다도 샘이 더 놀란 것은 바로 아이들의 자유분방한 외모였어요. 교복이 있었지만 찢어진 청바지 등 자유로운 사복 차림이었고, 다양한 원색의 염색은 기본이었고, 피어싱을 한 학생도 꽤 보였어요. 핸드폰과 노트북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었죠. 학교 공간을 이런 외모의 학생들이 점령하다니, 신선한 문화 충격이었어요. 학교 규정이 궁금해 지나가는 학생에게 물어봤죠. 외모에 대한 규정은 딱히 없고, 너무 혐오스러운 문신 같은 것만 아니면 된다고 하더라고요.(ㅎㅎ) 서로에 대한 ‘배려’만이 규정이었던 거예요. 외모 규정이 없는 대신 수업 시간에 절대 자서는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추후 샘들에게 여쭤보니, 외모 규제를 생활 지도 영역에서 과감히 제외하고, 아이들의 내실 있는 배움과 성장이라는 진짜 교육 목표에 집중하는 게 학교 목표라고 말씀해주셨어요. 학교 선생님들도 과연 잘 될까 의구심이 많았지만 현재는 만족도가 매우 높고, 많은 학교에 사례가 전파되었으면 한다고 자신 있게 말씀해주셨죠. 둘러보니 아이들의 자유분방한 모습만큼 수업은 좀 더 생기 넘쳐 보였고 아이들도 진지하게 참여하는 것 같았어요. 아이들의 외모는 크게 엇나가지 않고, 그냥 대학교 1, 2학년 정도의 평균적 모습들이었어요.     


사진 - Young샘

 

샘은 외모에 대한 담론이 있다면 이것이 ‘규제’의 영역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학교 규정은 일반 법체계로 보면 ‘형법’에 해당하죠. 그리고 형법은 의무와 처벌의 언어로 이루어지죠. 학교 규정 역시 공동체의 의무가 규정되어 있고, 어길 시 선도위 등 징계로 다스리죠. 이렇게 논리만 보면, 학교에서의 외모는 ‘형법’의 영역이자 ‘처벌’의 대상이에요. 요즘 학교 규정은 학교 공동체가 모두 참여해 제정하므로 민주적이니 괜찮지 않나 하고 말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공동체가 정한 외모 규정을 네 신체에 기입하지 않으면 처벌이 가해진다’는 논리가 사라지지는 않죠. 외모에 다수결이 가능할까요? 외모 법을 공동체가 정해 강요한다는 게 조금 무섭게 느껴지지 않나요? 사실 외모 규제 논리가 가장 강하게 작동하는 곳은 군대와 감옥 정도죠. 통제와 규율성이 중시될수록 외모에 대한 규율도 엄격해지죠. 학교는 더 이상 오로지 입시만을 위해 아이들을 통제하고 규제하는 공간이 아닌데 말이죠.


사실 외모에 대한 담론은 형법이 아닌 ‘미적 담론’이어야 해요.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아름답다 촌스럽다의 논리로 언급되는 주제이어야 하죠. 사회에서는 이런 논리로 자연스럽게 외모가 인정이 되는데, 왜 학교는 ‘형법’이라는 다른 논리가 있어야 하는 걸까요? 혁신 학교에서 학생이 말한 ‘혐오스럽지 않으면’이라는 기준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공동체 외모의 굳이 기준이 있다면, 자발적인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전부인 거죠. 그냥 일반 사회가 외모를 대하는 시선이죠. 우리 학교 학생들이 ‘규정이니까요’라는 말과 대비되네요.       


더 섬세하게 생각해볼 부분은, 외모가 ‘규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학창 시절 내내 노출시키는 것은, 잠재 학습이 이루어져 결국 사회, 회사 생활에서의 잠재적 외모 꼰대 양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거예요. 바람직한 외모에 대한 생각이 내재화돼 어떤 공동체를 가든 스스로의 기준을 마음속으로 세우게 되고, 그 기준에 어긋나는 사람에게 집단 압력을 가하게 되죠. 그래서 점점 개성과 창의성 강조되는 직장 환경을 생각할 때, 외모 규정은 오히려 ‘반교육적’인 것이 돼요. 한 때 서울시 교육감이 외모의 자율화 방향으로 학교가 지혜를 모아달라고 발언한 적이 있는데 깊이 공감됐어요. 4차 산업혁명시대와 외모가 규율의 언어에 묶여있는 것은 서로 어울리지 않죠. 형법과 규율의 영역이 아닌, 사회의 일반적인 담론인 미적 영역으로 정상화시킬 필요가 있어요.      


미국 공립학교의 정말 다양한 학생들의 외모를 보고 놀랐던 적이 있어요. 물론 다민족 국가라 애초에 외모 규정 같은 게 들어설 공간도 없었지만, ‘자기 외모 결정권’이라는 학생 인권 의식이 분명히 자리 잡고 있었죠. 우리나라는 대다수가 한국인이고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어, 보편적인 외모 기준을 어느 정도 세울 수 있다는 환상이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우리 사회가 다양성의 사회를 지향한다면 이러한 환상은 넘어서야 하며, 더 이상 이러한 논리가 미래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에 머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여학생들의 화장도 엄밀히 말하면 건강의 영역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청소년기 피부 건강을 위해 자제를 권장 혹은 설득하는 정도이지, 무작정 클렌징 티슈를 들고 닦게 강요하고, 선도위에 징계를 넣는 건 이제 멈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느 순간 두꺼운 화장 뒤 가려진 아이들의 진짜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혹시나 자존감이 낮아져 화장이 더욱 진해진 것은 아닌지, 친구 관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화장이 진해지는 것은 아닌지 등 화장을 하나의 징후로 보고 그 안의 마음을 읽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청소년기의 또래 심리가 발동해 무분별한 유행이 일어날 수 있다고 반론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규제가 풀려 그 반동으로 잠깐 외모에 큰 변화가 올 수도 있지만, 결국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가지 않을까 생각해요. 혁신 학교 샘들도 처음에는 이런 우려를 가졌지만, 오히려 외모 규정이 사라지니 아이들이 외모에 대한 청개구리 같은 강박이 사라지고 결국 자기만의 색깔대로 편안한 외모를 찾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샘 때도 두발 자유화가 되면 모든 남학생이 장발에 산발로 다닐 꺼라 많이 말씀하셨는데, 지금 남학생들 머리는 사실 평범하죠.


사진 - Young샘


샘은 여러분도 점차적으로 잠재적 외모 꼰대를 양산할 수 있는 외모 규정에 의문을 제기하고, 학교에 그래도 외모 규제가 있어야 한다는 막연한 강박에서 벗어났으면 해요. 공동체의 질서 못지않게 여러분의 자기 외모 결정권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이고, 외모는 자신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수단으로 나를 더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방향으로 활용돼야 한다고 믿어요. 샘도 아이들과 소통하는 시간에 더 이상 생활 지도라는 명목으로 껍데기 같은 외모 이야기가 침범하지 않게 노력해 볼게요.       


사실 샘 바리깡 고속도로 에피소드에 이야기가 하나 더 있어요. 그날 신규 체육 선생님이 우리 반 머리 자르기 담당이었는데, 학교 방침이니까 하시기는 하는데 얼굴에 근심 한 가득이신 게 느껴졌어요. 다들 혼날 마음에 자신의 바리깡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죠. 제 차례가 돼 선생님께서 제 머리를 자르시는데, 갑자기 정말 미안하다고 조용히 말해주셨죠. 아직도 그 말씀이 생생히 기억이 나네요. 분명 선생님의 진심 어린 말씀이 내 마음에 어떤 울림을 주었고, 그 울림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전 15화 태극기를 왜 가려야 하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