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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 Oct 07. 2020

태극기를 왜 가려야 하지?

안녕 애들아!     


이제 제법 날씨가 후덥지근해지는 것 같아요. 아직 아침과 저녁은 쌀쌀할 때도 있지만, 한 낮은 햇빛이 강해 조금만 산책해도 힘들어지네요. 여러분들도 조금씩 춘추복과 하복 중 무엇을 입을지 고민하는 시기인 것 같아요. 하루가 지날수록 제법 하복을 입은 학생 수가 늘어나네요. 멋쟁이들은 패션을 더욱 뽐낼 수 있는 겨울을 좋아한다는 말이 있는데, 왠지 춘추복을 끝까지 정갈하게 입은 학생을 보면 좀 더 멋에 관심 있는 학생으로 보이는 것은 샘의 착각일까요? 써놓고 보니 착각 맞는 거 같네요.(ㅎㅎ) 어떤 교복이든 편안한 게 최고인 것 같아요. 7교시까지 입고 생활하는 옷이니 갑갑함이 없었으면 해요. 요즘 사회적으로 편안한 교복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데, 여러분이 입는 교복이니 여러분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는 방향으로 갔으면 합니다.     


오늘의 주제는 ‘왜 태극기를 가려야 하지?’ 예요. 주제를 듣자마자 어떤 상황을 말하고 싶은지 바로 알겠죠? 학교에서 지필 평가를 보기 전에 항상 태극기를 천으로 가리지요. 아마 중학교 때부터 꾸준히 경험했을 거예요. 그런데 도대체 왜 가리는 건지 생각해본 적 있나요? 샘에게 물어본 학생이 아직 없는 것을 보니 다들 별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정말 매 시험마다 하나의 의식처럼 하는 행동인데 말이죠. 샘도 교직 경력 3년 차가 될 때까지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아, 아니네요. 신규 시절에 지필평가 교실 매뉴얼에 태극기를 가리라는 내용이 있길래 옆 샘께 툭 물어본 적이 있네요. 그때 친절하게 이유를 알려주셨죠. 도덕, 윤리 시간에 국가에 대해 배우면서 태극기를 학습하게 되고, 관련 문제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죠. 태극기에 대한 지식을 묻는데 교실 앞에 버젓이 정답이 있어 문제가 되었다고 해요. 이후 시험실 중요한 매뉴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전국 중고등학교 지필평가 기간 동안 챙겨야 하는 핵심 체크사항이 되었죠. 설명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은 ‘오, 신기하다’ 였어요. 이런 생각지 못한 부분까지 매뉴얼화된 게 섬세하게 느껴졌어요. 동시에 시험의 엄중함도 크게 다가왔죠. 당시에는 나름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태극기 모양 자체가 정답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 후 샘도 당연히 챙기는 시험장 준비가 되었고, 계속 반복하다 보니 거의 무의식적으로 확인하는 작은 강박이 되었죠. 실수로 까먹을 때는 시험 보기 직전에 얼른 달려가 잽싸게 가리기도 했죠. 샘이 이 행동에 처음으로 의심을 갖게 된 것은 우리 반 모범생 반장이 태극기를 가리지 않았다고 제게 다급히 찾아왔을 때였어요. 이미 시험이 끝난 뒤였는데, 반장의 지적에 아차 싶었죠. 당연히 아무 일도 없었고 제 건망증을 탓했죠. 하지만 동시에 우리 반 반장이 챙길 정도로 학생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중요한 각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럴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의심을 품게 되었어요.      


사진 - Young샘


생각을 거듭할수록 불필요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커져갔어요. 그냥 태극기 모양을 보고 맞출 수 있는 단순 지식문제를 내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요? 이미 중고등학교 윤리 샘들 사이에는 태극기가 교실에 비치되어 문제가 된 것을 아시고 더 이상 지필 문제로 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암묵의 규칙이 되어 버렸죠. 하지만 더 나아가 태극기의 모양을 묻는 단순 지식확인 문제를 위해 전국적으로 어마한 행정력이 낭비되고 있는 상황이 부조리하게 느껴졌어요. 물론 태극기에 대한 지식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이러한 유형의 문제는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에서나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국가에 대해 사고하기 시작하고 국가 정체성을 형성하는 시기에는 이러한 단순 인지를 확인하는 문제가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중고등학교 시험 문제에도 굳이 이런 류의 단순 인지 문제가 필요할까요? 이렇듯 태극기를 가리는 행위가 하나의 징후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단순히 태극기 문제를 넘어, 시험 전반으로 봤을 때 아직도 많은 부분이 단순 지식과 암기에 의지한다는 사실이 넌지시 암시된다고 생각했어요. 태극기의 모양을 묻는 1차적인 지식 문제에 대한 공포로 인해 모든 교사들에게 작은 강박으로 건다는 것은 분명 비정상적인 부분이 있어요. 그리고 그 생각의 끝은 결국 우리가 보는 시험으로 향하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더 놀라운 점은 심지어 수능 시험장 매뉴얼에도 있다는 거였어요. 천이나 종이로 가린 그림까지 친절하게 수록되어 있었죠. 하지만 수능 시험 문제에 태극기에 대한 단순 지식을 묻는 문제가 나올 리가 없죠. 자료 해석과 적용 문제가 주를 이루죠. 설령 태극기와 관련된 문제가 나온다고 해도 시험지에 그림으로 제시가 될 것이에요. 행정의 단순한 관성이 크게 다가오는 순간이었어요.   


사진 - Young샘

  

점점 태극기를 가리는 행위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조금 낯설게 다가오나요? 단지 불필요한 의례와 같다는 생각을 넘어, 더 큰 현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로도 느껴지나요? 이 주제가 우리 학창 시절에 빼놓을 수 없는 시험 자체에 대한 생각으로 확장시키는데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샘의 경우, 샘이 출제하는 시험 문제에 대해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사실 평가 항목에는 다양한 차원이 있죠. 단순 내용을 확인하는 문제에서 자료를 해석하고 적용, 그리고 비판적 의견을 제시하는 것까지 점검하는 사고의 층위가 다양하죠. 4차 산업혁명 시대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좀 더 고차원적인 사고를 계발하는 것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어요. 단순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알 수 있는 시험 문제는 그 적합성이 떨어지고 있죠. 자료 해석력과 적용 능력, 그리고 문제 해결력과 창의성 등이 더욱 요구되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죠. 이런 측면에서 샘도 다시 한번 반성하게 되었어요. 내가 출제하는 시험 문제는 단순 인지를 넘어 더 고차원적인 사고로 나아가고 있는지, 그 비율은 어느 정도인지 점검하게 되네요. 혹시 태극기를 보면 정답이 바로 나오는 문제처럼 불필요한 능력을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돼요.      


이렇게 비합리적인 행정이 관성처럼 이어진 사례가 하나 더 있었어요. 샘 신규 시절에 아이들이 서술형 답안지에 수정을 위해 두 줄을 그을 경우 그 위에 감독 도장을 꼭 찍어야 했죠. 수정을 위해 그어진 모든 두 줄 위에 반드시 도장이 있어야 수정이 인정되었죠. 서술형 답안 양이 많은 시험일 경우 100번 이상 도장을 찍느라 교실을 계속 돌아다녀야 했죠. 시험의 엄중함 때문에 안전하고 보수적으로 운영되는 것은 이해되지만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죠. 도장을 찍는 이유는 단순했어요. 교사가 나쁜 마음을 먹고 서술형 답안을 자의적으로 수정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죠. 교사의 비윤리적인 비위 가능성을 미연에 차단하자는 명분이었죠. 이렇듯 명분 자체가 설득력이 떨어져 많은 교사들이 불합리함을 지적했지만 학교 관리자는 주저했어요. 가능성이 극히 낮은 사건을 미연을 방지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행정력을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요? 사실 범죄를 저지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저지를 텐데 왜 윤리로 접근해야 할 문제를 행정 과잉으로 상쇄하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여기서도 결국 우리가 가진 평가 방식의 문제가 있죠. 두 줄 위에 도장을 찍는 행위는 사실 단답형에 가까운 단순 지식을 묻는 문제가 주로 출제된다는 것을 의미하죠. 마치 인터넷 검색 창에 치면 바로 나올 수 있는 자판기 같은 정답들이죠. 논리를 전개하고 자신의 의견을 적는 문제였다면 과연 도장을 찍을 필요가 있었을까요? 몇 부분을 수정한다 해도 답안지 전체 논조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으니 당연히 필요치 않았을 것이에요. 최근 서술형 문제를 학생의 근거와 의견을 담은 논술형으로 개선하라는 지침이 공문으로 전달되고 있는데, 이러한 반성과 맥을 같이 해 점점 개선되고 있구나 생각되었어요.     


사진 - Young샘


물론 기존 관성을 따르는 것이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에요.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죠. 대표적인 예가 자동차 구조예요. 자동차에 가장 이상적인 구조는 앞자리에 운전자석만 있는 3인 좌석 구조인데, 마차 문화의 관성이 그대로 이어져 지금의 4인 좌석 구조가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해요. 물리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구조는 아닐지라도 큰 문제는 없고 자동차의 기본 구조가 되었죠. 하지만 이와 달리 더 이상 설득력이 떨어지는 관성을 계속 이어가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것이 아이들에게 공공연하게 보이는 행동이라면 더욱 반성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봐요. 학교에서 진행되는 모든 행위가 교육적인 뉘앙스를 풍겨 아이들의 무의식 속으로 은연중에 스며들게 되죠. 비합리적인 ‘의례’를 현시하는 것은 중세적 현상으로 교육적이지 않다고 생각해요. 물론 너무 미시적인 측면에 큰 의미를 두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미시적인 것이라도 그 안에 스며든 복합적인 의미가 결국 아이들에게 전달된다고 믿어요. 결국 미시적인 것이 더 큰 거시적인 상황을 통찰할 수 있게 도와주는 중요한 통로가 되죠. 미시적인 것이 하나의 징후가 되어 그 안에 관통하는 복합적인 층위를 드러내요. 더 큰 숲을 볼 수 있는 촉진제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미시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힘이 크다고 생각해요.      


샘은 이번 주제를 통해 우리 주변 당연한 것이 꼭 당연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 어쩌면 낯선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예를 통해 느꼈으면 해요. 가끔은 주변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천천히 음미했으면 해요.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만 받아들일 때 사고는 멈추고 관성이 진행되죠. 4차 산업혁명 시대 창의적인 사고를 위해 결국 비판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해요.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서 비판적 사고의 칼을 점검해보기 바랍니다. 예전 비정상회담 독일 대표였던 다니엘 씨가 한 강연 프로그램에서 했던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중학교 수업 시간 첫날 과목 선생님께서 지금부터 샘이 하는 모든 말과 교과서의 내용을 모두 비판하라고 했다고 해요. 태극기는 샘이 먼저 발견했는데, 다음에는 여러분이 샘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질문으로 우리 주변을 돌아보게 도와줄 것이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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