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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 Oct 14. 2020

민지의 비판 정신

안녕 애들아!     


오늘은 ‘비판적 사고’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로 이야기해볼까 해요. 요즘 아이들은 확실히 예전에 비해 많이 순해지고 학교에 대해서도 별 불만 없이 행복하게 지내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비판적 사고 측면에서는 다소 약해진 게 아닌가 생각도 들어요. 반항하는 경우가 드물고 비교적 시스템에 순종적이죠. 원인을 한번 생각해봤는데, 샘 때에 비해 학교 환경이 많이 개선된 게 일단 큰 것 같아요. 예전에 비해 학교가 많이 신사적(?)으로 변했죠. 학생인권조례가 통과되면서 학생에 대한 체벌이 사라졌고, 각종 강압적인 요소들이 줄어들었죠. 행복한 학교에 대한 공감이 확대되면서 체험 위주의 다양한 프로그램도 많이 늘어났고, 교실 내 학생 수도 꾸준히 줄어 교실 내 학습 환경도 많이 쾌적해졌어요. 또 다른 이유로는, 여러분이 점점 선진국 아이들의 속성을 띠게 되는 것 같아요. 대부분 경제적, 문화적 부족함 없이 자란 느낌이라 성격이 너그러워 보여요. 어렸을 때부터 욕구가 잘 채워지고, 현재도 다양한 재미 요소가 많아 비판적 사고의 필요성 자체를 잘 못 느끼는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정시보다는 내신과 생기부 중심인 수시 비율이 커지면서 학교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많이 줄어든 것 같아요. 학교와 선생님들께 불만을 표시해봤자 생기부에 악영향을 줄 수 있어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생기부가 강화되는 것이 교과 성적뿐만 아니라 비교과 영역도 골고루 성장하게끔 유도한다는 장점도 있지만, 체제와 권위 순응적인 학생이 양산할 수도 있다는 단점도 있는 것 같아요. 과거에 비해 학교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서 비판적인 사고가 줄어들었다면 다행이지만, 혹시 자기만의 주장과 사고가 약해지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 한 켠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해요.      


이런 전반적인 분위기와 정반대의 학생이 샘 반에 있었는데, 샘이 결코 잊지 못할 학생 중 한 명이예요. 신변 보호(?)를 위해 ‘민지’라는 가명으로 부를게요. 민지의 첫인상은 매우 차분하고 여느 여고생과 다를 게 없었어요. 그녀의 전투적인(?) 마음을 처음 확인한 것은 체험학습 감상문이었어요. 다들 체험학습을 다녀온 후 좋았던 점, 친구들과의 우정 등을 평범하게 작성했는데, 민지의 글은 남들보다 불만이 좀 많았죠. 하지만 더 놀랐던 점은, 특정 샘에 대한 불만과 비판을 다소 거친 표현까지 쓰면서 서슴없이 적어놨던 점이에요. 샘에게는 감히 할 수 없는 말들이 써져 있었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조용히 불렀죠. 민지는 샘이 안 읽을 줄 알았다고 매우 당황해하더라고요. 샘에게 제출하는 건데 샘이 어떻게 안 읽을 수 있냐고 반문하자 정말 죄송하다고 했죠. 따끔하게 혼낸 후 도대체 왜 이렇게 썼는지 이유를 물어봤어요. 그 샘이 수업 시간에 여성의 외모에 대해 말실수를 한 후 점점 싫어졌는데 그 말을 또 반복해서 욱하는 마음에 적었다고 하더라고요. 말을 들어보니 다소 수긍 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방법이 매우 잘못되었다고 크게 혼냈던 기억이 나네요. 확실히 야무진 학생이라 바로 잘못을 인정하고 수긍했죠. 당시 샘은 불쾌했던 감정이 더 앞섰던 것 같아요. 앞으로 우리 반에 있으면서 내가 하는 일에 딴지를 걸진 않을까 눈치를 보게 되더라고요.     


그 후에도 민지의 전투력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자신이 생각했을 때 부당하다고 느끼면 어김없이 목소리를 냈죠. 여러 샘들과의 언쟁도 불사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민지의 주장과 행동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고, 많은 부분 수긍되기 시작했어요. 먼저 청소 담당 선생님에게 2학기에 갑자기 늘어난 청소량의 부당함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을 전해 듣게 되었죠. 비록 태도가 전투적이라 담당 선생님께서 많이 당황해하셨지만, 표현이 거칠어서 그랬을 뿐 그 안의 내용을 보면, 자신의 부당함을 정확히 파악하고 논리적으로 주장하고 있었죠. 문학 샘과의 논쟁은 더욱 인상 깊었어요. 독서 수행평가로 유명한 근대 문학작품이 선정되었는데, 여성 비하적 내용이 있으므로 절대 선정해서는 안 된다고 샘께 따지는 거예요. 문학샘은 학생으로부터 작품 선정 자체에 문제 제기를 받은 게 처음이라 매우 난색을 표하셨죠. 샘도 역시 우리 민지는 독특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궁금해서 정말 그러한 주장이 있는지 찾아보게 되었어요. 여성 비하적인 내용을 비판하는 글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했어요. 평소 민지가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다는 게 느껴졌죠. 아무리 권위가 있고 유명한 작품이어도 민지의 주관에서는 학습 가치가 낮았던 거예요.      


사진 - Young샘


민지의 전투력 매력 있지 않나요? 점점 비판적 사고 측면에서의 아이의 장점이 인상 깊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결정적으로 학기말 영어 시간에 쓴 감상을 보고 민지의 성장을 크게 느꼈어요. ‘성장 마인드(Growth mindset)’로 유명한 카롤 드웩(Carol Dweck) 교수의 테드 영상을 보고 자신 만의 감상을 쓰는 과제였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교수 주장의 일부를 인용해 단편적인 감상만 적었죠. 자신의 능력에 제한을 두지 말고 꾸준히 성장한다는 믿음의 중요성과 환경 조성의 필요성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이에 민지는 개인의 성공에 대해 지나치게 개인의 의지와 노력만 강조하고 있으며, 개인을 둘러싼 사회구조적인 시선이 부족하다는 의견을 조리 있게 작성해냈어요. 누구보다도 종합적인 시선을 담은 글을 작성했죠.      


처음에는 비판적인 마음만 있고, 논리력이 약하고 방식도 거칠었는데, 점점 비판의 논점이 보다 합리적이고 균형 잡혀 가는 걸 느낄 수 있었죠. 무엇보다도 자신이 믿는 확고한 관점을 바탕으로 문제를 비판적,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처음에는 민지를 바라보는 마음이 불편했는데 점점 마음속으로 응원하기 시작했죠.      


민지를 보면서 사실 샘 학창 시절도 많이 생각났어요. 과거에는 민지 같은 학생이 확실히 더 많았어요. 왜냐면 20년 전 학교는 비판적인 생각이 절로 가능한 환경이 많았거든요. 체벌이 일단 심했고, 지나치게 권위적인 샘들도 있었죠. 강압적인 두발 검사는 늘 불만의 대상이었고, 체벌을 받을 때마다 샘들에 대한 반항심이 자라났죠. 10시까지 강제 야자는 왜 하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사실 샘은 민지보다 더 했던 경험이 있어요. 고등학교 때 동아리실을 자유롭게 이용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새로 오신 샘께서 동아리실을 샘이 관리하고, 필요할 때 허락을 받는 방식으로 변경하셨죠. 20년 동안 자율적으로 운영되던 동아리실 사용이 갑자기 통제로 바뀌니 반항심이 커져 샘과 심하게 언쟁했던 기억이 나네요. 물론 그때 너무 어려서 샘에게 공손하지 못했던 게 아직도 후회가 되지만 동아리원들과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것 같아요. 이렇듯 샘의 비판 의식은 내 권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좀 더 의식 있는 학생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줬던 것 같아요. 민지를 보면서 학창 시절 추억과 반항했던 마음들이 생각나 내심 반가웠던 것 같아요.  


사진 - Young샘

    

샘은 비판적 사고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아이들에게 필요한 소위 4C 역량에도 비판적 사고가 포함되어 있죠. [4C : 창의성(Creativity),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협력과 융합(Collaboration), 소통(Communication)] 비판적 사고는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자신만의 관점을 통해 합리성을 점검하게끔 하죠. 특히 청소년들은 아직 순수해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진리로 믿어버리는 경향이 강한데, 이때 잡힌 잠재적 신념들이 평생의 가치관에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주체적 관점을 바탕으로 한 상황 해석 능력을 꼭 길러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모든 발전은 항상 기존의 것에 대한 비판과 성찰에서 출발하죠. 비판적인 사고가 창의적 사고의 기초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샘은 비판적 사고라는 말보다 종합적 사고라는 말을 더 선호하는 것 같아요. 비판적 사고를 통해 결국 상황을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되니까요. 사고의 다양화와 확장이 교육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라고 할 때, 비판적 사고는 가장 빠른 지름길을 제공하죠. 사실 샘이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도 여러분이 하루 종일 생활하는 공간인 학교부터 샘과 함께 다각도로 생각해보자는 의도가 있어요. 진정한 비판적 사고는 여러분과 관련 없는 원대한 주제보다 실제 생활 속 주제를 다룰 때 더 튼튼히 뿌리를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비판적 사고는 청소년기 심리발달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요. 샘이 읽은 글에 따르면, 아이는 청소년기에 ‘울타기’를 확인하고 싶다고 해요. 이때의 울타리는 ‘공격해도 사라지거나 무너지지 않고, 나를 무너뜨리지도 않으며, 늘 그 자리에서 한결같이 내 공격성과 버텨주는 어른과 사회’라고 합니다. 이 버텨주는 울타리를 경험하기 위해 아이는 공격성을 가지고 ‘울타리 붕괴실험’을 기성세대에게 가한다고 하네요. 아이의 비판적 마음과 사고를 견뎌주는 어른이 많을수록 아이의 울타리 붕괴실험이 더욱 많이 성공하겠죠? 이렇게 울타리를 확인하게 되면 자신과 타인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게 되고, 실험 종료와 함께 성인으로서 사회에 진입하게 된다고 하네요. 즉 건전한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용기를 낸 학생일수록 심리적 울타리를 더 많이 확인할 확률이 높겠네요. 그 결과 심리적 안정을 가지고 자신만의 색깔을 표현하는 어른이 될 가능성이 더 커지겠죠. 마지막으로 이 글은 공격의 대상이 된다는 건 울타리로 삼고 싶다는 뜻이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기분 좋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어른들에게 조언하면서 마무리가 돼요.      


그 많던 민지들은 어디로 갔나 생각을 해봐요. 사실 샘도 교직에 있으면서 아이들이 다양한 의견을 낼 수 있는 상황에 심리적 저항을 많이 느껴 주저했던 것 같아요.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을 반기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래도 좀 더 비판에 대해 말랑말랑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아요. 샘은 그동안 울타리가 될 조건을 갖추었나 반성하게 돼요. 학급 회의를 더 자주 열고, 학생의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수집하는 등 소통의 창구를 적극적으로 열었나 생각해보니 많이 부족했네요. 수업 역시 비판적 사고 확장은 많이 신경 쓰지 못한 것 같아요. 영어는 언어 과목이라는 생각에 비판적 사고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는데, 비판적인 발문을 추가할 수 있는 부분을 충분히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여러분의 비판적 사고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흐뭇해했던 기억이 나네요. 학생 규정을 개정하기 위해 각 반별로 회의를 통해 개정 요구사항을 수합하라고 했을 때, 기존 학생 규정의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합리적인 의견을 많이 제시하더라고요. 비록 의견이 많지는 않았지만, 샘에게 회의 결과를 종이 1장으로 소심하게 제출하는 걸 보고 많이 기특했죠. 생각해보니 과거보다 반항심(?)은 줄어든 것 같으나, 학교에 공식적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루트는 많아졌죠. 이러한 학급 회의나 학생 대토론회 등을 통해서요. 이런 공식적인 루트에 적극 참여해 여러분의 합당한 문제의식을 조금씩 표현했으면 좋겠어요. 결국 학교의 주체는 여러분이니까요.      


가끔 민지에게 혼만 낸 게 후회가 돼요. 물론 표현이 잘못됐다면 지적해주되, 비판적인 내용의 핵심을 파악해 칭찬할 부분은 칭찬하고, 좀 더 생각이 발전할 수 있게 도와주지 못한 게 못내 아쉽네요. 미약하게나마 정의감, 약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 사회구조에 대한 관심 등의 씨앗이 보였거든요. 민지가 앞으로 세상을 더욱 많이 경험하면서 이러한 씨앗들을 더욱 발전하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들도 좀 더 용기를 가지고 부딪치기도 하고 실수도 경험하면서, 더욱 단단한 내면을 키워가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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