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Mitch Albom의 'Tuesdays with Morrie'
시작한 날: 2024년 8월 30일
읽은 분량: ~The Second Tuesday We Talk About Feeling Sorry for Yourself
Well, for one thing, the culture we have does not make people feel good about themselves. We’re teaching the wrong things. And you have to be strong enough to say if the culture doesn’t work, don’t buy it. Create your own. Most people can’t do it. They’re more unhappy than me—even in my current condition.
이 정도 학교는 들어가야 될 것 같아서, 그래야 부모님 면도 좀 설 것 같아서, 그래서 원하지 않았지만 이 전공을선택했는데, 아무리 해도 이건 저랑 안 맞는 것 같아요. 죄송해요.
A는 지난해 이름 난 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올해 자퇴를 결정했다. A의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잠시 멍해졌다. 꿈을 좆는다는 것에 대해서 A와 이야기를 나눈 시간들을 떠올렸다. 엄마는 철학없는 주류사회의 흐름에 부유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A를 돕고 싶었다.
Are you trying to be as human as you can be?
이 질문을 놓고, 엄마와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A였지만, 어느 사이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아닌, 타인이 바라는 사람에 맞춰가고 있었다. 물론 사랑하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기특한 마음도 있었겠지만, 그래서 더 엄마를 멍하게 했다. 언젠가, 어디선가 좋은 대학을 가면 내가 기쁠거라는 메세지를 주었다는 의미일테니까. 그토록 거스르고 싶던 것, 그래서 더 열심히 책읽고 토론하고 공부했었는데 말이다.
괜찮아. 자퇴를 하겠다는 큰 결정을 내린 것만 봐도 우리가 그동안 고민한, 내 인생에 주인이 되는 그 길을 위한 시간 헛되지 않았다.
엄마는 A를 토닥였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A의 엄마를 존경한다. 이러한 면에서. Morrie같은 어른과 엄마가 필요하다. 특히나 철학적 사유와 고민이 매우 미약한 우리 사회에서는 말이다.
대한민국 엄마들 아자아자!
Why did we, bother with all the distractions we did? Back home, the O. J. Simpson trial was in full swing, and there were people who surrendered their entire lunch hours watching it, then taped the rest so they could watch more at night. They didn’t know O. J. Simpson.
금자씨가 그랬다.
너나 잘하세요.
저녁 나절이면 절여진 배추처럼 소파에 늘어져 생각해본다. 이 번잡한 머릿 속, 무슨 일이 있었나. 그리고는 깨닫는다. 하루종일 나에게 별 의미없는 많은, 저 너머의 사건, 사고의 소음에 노출되어있었음을, 그것도 자발적으로. 뉴스, 유튜브, 정적이 싫어 틀어놓은 음악에 한시도 쉴틈없이.
걱정하다, 히히덕거리다, 화내다, 슬프다가...지끈지끈 머리가 아프다.
조용히, 잠시 모든 매체를 다 끄고 앉아있으면 올라오는 생각이 있다.
나나 잘하자.
잠시 꺼두라던 광고가 생각난다.
How useful it would be to put a daily limit on self-pity. Just a few tearful minutes, then on with the day. And if Morrie could do it, with such a horrible disease …
It’s only horrible if you see it that way,” Morrie said. “It’s horrible to watch my body slowly wilt away to nothing. But it’s also wonderful because of all the time I get to say good-bye.
자기연민.
내 슬픔과 고통은 사실 나만 안다. 그래서 너무 넘치거나 모자란 타인의 위로보다 스스로 적절히 자기를 토닥이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런데, 이게 과하거나 습관이 되면, 파괴적인 힘을 발휘한다. 특히나 부모가 자기연민이 과하면, 자녀가 불필요한 죄책감을 가지게 되고, 상대배우자가 자기연민이 과하면 나도 덩달아 밝고 행복하기가 어렵다.
나도 과다 자기 연민의 수렁에 빠졌던 적이 있고, 지금도 싱크홀처럼 길 가다가도 숭덩 빠질때가 있다.
예전과 다른건, 지금은 내가 그 상태를 정상인 상태와 구분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참으로 우리집 두 남자에게 다행인 일이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자기연민에 절여지는 날, 그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지 모르는 토네이도를 맞이하는 기분이 되어야하기 때문에.
그래서 모든 경험은 귀하다.
머리털처럼 많은 자기연민의 날들이 나에게 준 깨달음으로 나는 전보다 '자주' 내 주변인들과 평화로울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아무 준비없이 세상에 와서, 엉겁결에 누군가의 자녀가 되고, 엉겁결에 누군가의 친구가 되고, 엉겁결에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남편이 되고, 엉겁결에 부모가 되어서 사랑을 한다. 숨 쉬는 방법을 따로 배운적 없지만 숨을 쉬며 살듯이. 그리고 숨을 쉴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고서야 그동안 내가 어떻게 숨을 쉬었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사랑을 잃고서야 사랑이 존재했음을 알게 된다.
작정하고 정한 것이 아닌데, 연거푸 '사랑'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책을 읽게 되었다. 살면서 이렇게 집중적으로 '사랑'을 고민해본 적이 있었던가. 심지어 이 책의 Morrie 교수는 지난 책, The Art of Loving 의 저자, Erich Fromm을 언급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겹치는 우연에서 운명을 찾는 습관이 있다.
누가 나에게 이제는 좀 제대로 사랑할 때, 뭐 그런 말 하고 싶은건가?
올 가을, 사랑하라는 운명이야. 이건 필시.
복숭아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남편이 오고가는 길목에 소복이 담아 두었다.
오다가 주웠다고 말하고 싶은 것 꾹 참고.
Have you found someone to share your heart wi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