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언니 말로 그랬다. 소개팅은 계속 도전하는 거라고. 백번을 해봐야 진정한 너의 하나를 만날 수 있다고. 어쨌거나 홀로 주말을 보낸다는 건, 어떤 기회조차 없는 거라고. 꾸중섞인 언니 말에 나는 알겠다, 잘 생각해 보고 연락 주겠다,한 마디를 김언니는 그래, 잘 생각해 봐,를 끝으로 일단락 지었다. 내가 떤 건 내숭이었다. "나 소개팅 해줘! 나!나!나! It's me!" 하기엔 왠지 부끄럽잖아.
사실 주말이면 무료할 때도 많았다. 하는 일이라곤 독서모임 들렀다 헬스장 가는 정도. 하나같이 즐거운 일이지만, 연애와 비할 바는 아니다. 언니 말이 틀린 말도 아니긴 했다. 가능성을 만들어야 가능한 일 일테니까. 할까, 말까. 소극적인 나에게 연락처 부터 건넨 건 언니다.
"이름은 초롱이, 현재 OO게임 회사 근무 중(그 유명한 xx게임 만든 회사), 나이 서른 초중반. 연락 올 거야. 주말에 나가서 밥 먹고 와!"
그리고 사진을 하나 보내왔는데, 이번도 비슷했다. 옆으로 돌려 선 고개의 흑백 사진. 두 손 가지런히 모아 입 앞에 두고 있어 내가 알 수 있던 건 안경 쓰시는 분이구나, 그렇구나.외모가 전부는 아니라, 중요한 것도 아니라, 무엇보다 잘 안보이는 지라 대충 훑고 엑스를 눌렀다. 이번은하염없이 폰만 쳐다보지 않았다. 언젠가 오겠지, 때 되면 보내겠지. 첫 경험에서 온 여유다.
"안녕하세요. 초롱이입니다."
퇴근 무렵 초롱이씨에게 톡이 왔다. 간단한 대화가오갔다. 어디 사는지, 어느 날이 편한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톡에서초롱이씨, 그러니까 소개팅남2으로부터도 느꼈다. 일정 거리 이상 친해지려 하지 않는구나. 만나기로 한 날까지, 우리 대화는 이게 전부다. 그로부터 2주가 흘러 압구정에서 소개팅남2를 만나기로 한 날이다.
약속에 늦는 일을 싫어 한다. 여기서도 됨됨이가 보이기 때문이다. 작은 일에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면, 1분도 늦고 싶지 않다. 칼같은 이유다. 상대 볼 때도 마찬가지. 약속 허투로 여기는 사람은 만나기 전부터 별로다. 남 시간 소중한 줄 모르는 사람은, 꺼려진다.
약속 시간보다 20분 정도 이르게 도착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날 중 하나라 제법 쌀쌀하다 못해 추웠던 기억이 난다. 20분을 압구정역 4번 출구에 서성였다. 소개팅, 기대는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백번 중 하나를 위해 백번을 희생하는 일이라는 것은 첫 소개팅과 그간 쌓인 연륜으로배웠다. 대충 다 알았다. 그랬는데, 그럼에도, 자꾸만, 하나의 설렘이 꿈틀꿈틀 세어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하트) 좋은 사람(하트)이 나오면 좋겠다.헤헿//'
20분 벌벌 떨며 매무새를 정리했다. 삐져나온 앞머리 한 가닥이 거슬려 요리조리 넘겨 보기도, 셔츠 실밥 꼬깃꼬깃숨기기도. 스테인레스로 된 문 틈으로 여기저기 나를 살피는 데, 카톡이 왔다. 소개팅남2였다.
"죄송해요.ㅠㅠ 25분쯤 늦을 거 같아요. 빨리 갈게요."
"네. 천천히 오세요!"
ㅋㅋ는 붙이고 싶지 않았다.흐그느끄뜨므느드(화가 났기 때문이다.) 추웠다. 배고팠다. 소개팅 자리였다. 말 다 했다. 그래도 이해해 보기로 했다. 사정이 있겠지. 45분을 벌벌 떨었다. 저장하지 않은 번호지만 누군지 알 것만 같던 전화가 정확히 25분 뒤 걸려왔다. 이번에도 처음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시나요?혹시 뭐 입고 계세요?"
"아 저 여기 꽃집 앞에 셔츠 입고.."
압구정역, 이곳은 숨겨둔 소개팅 맛집인듯 했다. 주변엔 나뿐 아니라 곱게 치장한 젊은 남녀 몇이 보였고, 각자는 전화를 받더니 전화 건 상대를 만나 어색한 인사와 함께 자리를 떴다. 그들에 나를 대입하며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무튼. 소개팅남, 4번 출구 앞 누가 소개팅녀이기를 바랐는지 알 수 없지만, 4번 출구로 에스컬레이터 타고 올라오던 몇 남자 중 이 사람이면 좋겠다,는 바람은 나에게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나가거나 나와 같이 서 있던 여자에게 전화를 걸고 인사를 건넸다. 괜히 아쉬워 하는데, 또 다른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폰 넘어 수신되는 음성과 100% 싱크로율의 입 모양. 그가 바로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