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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경 Sep 30. 2020

(5) 일단 밥이나 먹고 와


"소개팅이요?ㅋㅋ 에이. 안 할래요."

"한 번 해봐. 자꾸 만나봐야 기회가 생기지. 아무 것도 안하면 기회도 없다 너."


언니 말로 그랬다. 소개팅은 계속 도전하는 거라고. 백번을 해봐야 진정한 너의 하나를 만날 수 있다고. 어쨌거나 홀로 주말을 보낸다는 건, 어떤 기회조차 없는 거라고. 꾸중섞인 언니 말에 나는 알겠다, 잘 생각해 보고 연락 주겠다,한 마디를 언니는 그래, 잘 생각해 봐,를 끝으로 일단락 지었다. 내가 떤 건 내숭이었다. "나 소개팅 해줘! 나!나!나! It's me!" 하기엔 왠지 부끄럽잖아.


사실 주말이면 무료할 때 많았다. 하는 일이라곤 독서모임 들렀다 헬스장 가는 정도. 하나같이 즐거운 일이지만, 연애와 비할 바는 아니다. 언니 말이 틀린 말도 아니긴 했다. 가능성을 만들어야 가능한 일 일테니까. 할까, 말까. 소극적인 나에게 연락처 부터 건넨 건 언니다.


"이름은 초롱이, 현재 OO게임 회사 근무 중(그 유명한 xx게임 만든 회사), 나이 서른 초중반. 연락 올 거야. 주말에 나가서 밥 먹고 와!"


그리고 사진을 하나 보내왔는데, 이번도 비슷했다. 옆으로 돌려 선 고개 흑백 사진. 두 손 가지런히 모아 입 앞에 두고 있어 내가 알 수 있던 건 안경 쓰시는 분이구나, 그렇구나. 외모가 전부는 아니라, 요한 것도 아니라, 무엇보다 잘 안보이는 지라 대충 훑고 엑스를 눌렀다. 이번 하염없이 폰만 쳐다보지 않았다. 언젠가 오겠지, 때 되면 보내겠지. 첫 경험에서 온 여유다.


"안녕하세요. 초롱이입니다."


퇴근 무렵 초롱이씨에게 톡이 왔다. 간단한 대화 오갔다. 어디 사는지, 어느 날이 편한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톡에서 초롱이씨, 그러니까 소개팅남2으로부터도 느다. 일정 거리 이상 친해지려 하지 않는구나. 만나기로 한 날까지, 우리 대화는 이게 전부다. 그로부터 2주가 흘러 압구정에서 소개팅남2를 만나기로 한 날이다.



약속에 늦는 일을 싫어 한다. 여기서도 됨됨이가 보이기 때문이다. 작은 일에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면, 1분도 늦고 싶지 않다. 칼같은 이유다. 상대 볼 때도 마찬가지. 약속 투로 여기는 사람은 만나기 전부터 별로다. 시간 소중한 줄 모르는 사람은, 꺼려진다.


약속 시간보다 20분 정도 이르게 도착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날 중 하나라 제법 쌀쌀하다 못해 추웠 기억이 난다. 20분을 압구정역 4번 출구에 서성였다. 소개팅, 기대는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백번 중 하나를 위해 백번을 희생하는 일이라는 것은 첫 소개팅과 그간 쌓인 연륜으로 배웠다. 대충 다 알았다. 그랬는데, 그럼에도, 자꾸만, 하나의 설렘이 꿈틀꿈틀 세어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하트) 좋은 사람(하트)이 나면 좋겠다. 헿//'


20분 벌벌 떨며 매무새를 정리했다. 삐져나온 앞머리 한 가닥이 거슬려 요리조리 넘겨 보기도, 셔츠 실 꼬깃꼬깃 숨기기도. 스테인레스로 된 문 틈으로 여기저기 나를 살피는 데, 카톡이 왔다. 소개팅남2였다.


"죄송해요.ㅠㅠ 25분쯤 늦을 거 같아요. 빨리 갈게요."

"네. 천천히 오세요!"


ㅋㅋ 붙이고 싶지 않았다. 흐그느끄뜨므느드(화가 났기 때문이다.) 추웠다. 배고팠다. 소개팅 자리였다. 말 다 했다. 그래도 이해해 보기로 했다. 사정이 있겠지. 45분을 벌벌 떨었다. 저장하지 않은 번호지만 누군지 알 것만 같던 전화가 정확히 25분 뒤 걸려왔다. 이번에도 처음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시나요?혹시 뭐 입고 계세요?"

"아 저 여기 꽃집 앞에 셔츠 입고.."


압구정역, 이곳은 숨겨둔 소개팅 맛집인듯 했다. 주변엔 나뿐 아니라 곱게 치장한 젊은 남녀 몇이 보였고, 각자는 전화를 받더니 전화 건 상대를 만나 어색한 인사와 함께 자리를 떴다. 그들에 나를 대입하며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무튼. 소개팅남, 4번 출구 앞 누가 소개팅녀이기를 바랐는지 알 수 없지만, 4번 출구로 에스컬레이터 타고 올라 오던 몇 남자 중 이 사람이면 좋겠다,는 바람은 나에게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나가거나 나와 같이 서 있던 여자에게 전화를 걸고 인사를 건넸다. 괜히 아쉬워 하는데, 또 다른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폰 넘어 수신되는 음성과 100% 싱크로율의 입 모양. 그가 바로 그였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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