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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경 Oct 19. 2020

편부모 사랑

엄마 사랑해

엄마는 작가가 된 딸이 우리 얘기 남발하고 다니는 걸 꺼리지만.



중학교 1학년 14살 봄, 아빠가 돌아가셨다.

사정은 좀 길고 슬픈데, 간단히 하자면 가정폭력으로 엄마는 아빠로부터 도망쳐 별거 중이었고, 그 기간 중 아빠에게 심장마비가 왔다. 그날로 더는 심장이 뛰지 않는다. 우리는 아빠를 잃었다.

피할 수 밖에 없어 떨어져 산 기간이었다. 다만 17년이 지난 지금도 엄마는 미안해 하는 거 같아 내가 다 속상하지만. 어쨌거나 그런 일이 있다.


그때로 나는 편부모 가정이 되었다. 늘 엄마편이던 나라, "지 애미 같은" 나는 아빠사랑 덜 받고 자랐긴 했지만, 아빠가 세상에 없는 것과는 별개의 감정이었다. 곁에 있으며 받지 못하는 사랑과, 곁에 없어 받을 수 없는 사랑은 다른 거니까. 고백하자면 나도 아빠한테 좋은 딸은 아니었다. 술 먹고 횡포 부릴 때 마다 생각했다. 아빠가 얼른 잠 들었으면 좋겠다,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원히 잠들길 바라고 했던 기도는 아니었는데 어쨌거나 영면이 되었지만.


아빠의 화장 날, 엄마는 화장터 가기 전 울부짖으며 말했다.


"아빠, 애들 잘 키울게."


엄마의 처절한 짖음이 있었고, 결국 엄마는 아빠와 한 약속을 지켰다. 엄마 나이 갓 마흔, 혼자 힘으로 우리 두 딸 보란듯이 잘 키워냈다. 엄마는 아빠 역할까지 도맡아 새벽부터 일을 하고 늦은 밤이 되어야 돌아왔다. 한겨울이면 발과 볼 꽁꽁 얼어 동상에 걸리는 일도 잦았다. 엄마 볼이 빨간 건, 그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우리집은 넉넉하지 못했다. 경제적 부족함에 하고 싶은 많은 것중 소수만 골라 하거나, 참아야 했다. 다만 다른 모든 일엔 엄마의 전적인 믿음과 지원 아래 전부 하고 살았다. 믿음과 지지가 그런 거다. 엄마 사랑 방식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으로 공부했고, 주눅듦 없이 건강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모든 건 밝고 따뜻한 엄마 덕분이다.


엄마는 나와 생각이 조금 다른 모양이다. 해준 것 보다, 본인 나를 어떻게 입히고 먹였는지 따위 모두 잊고 못해준 것만 마음에 남긴다. 나에게 남들 겪지 않아도 되는 시련이나 조금 아픈 일이 찾아 올 때마다 엄마는 말한다.


"네가 엄마 잘 못 만나 고생이구나."

"어떻게 모든 게 다 엄마 잘못이래."


엄마는 흐르려는 눈물만 두 손으로 콕콕 찍어 감추고 있다. 이럴까봐 나는 엄마가 되는 게 두렵다. 엄마의 사랑을 보면 알 수 있다.




간혹 누구는 말한다.

부모의 사랑이 온전하지 않은 가정, 그러니까 어쩌면 편부모 가정도 이것에 속한다면 그럴테고, 그곳에서 자란 아이에겐 결핍 있다고. 그리고는 결핍이라는 색안경으로 바라본다. 뭐 하나 꼬투리 잡을 거 없을까,하는 기색이 보인다. 그러면 그 더러운 색에 끼인 나는 생각한다. 우리 엄마가 나를 어떻게 키웠는데, 우리를 어떻게 키워냈는데, 내가 어떤 사랑을 받으며 자랐는데, 이렇게나 잘 자라났는데. 보통 억울한 일 아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를 보여주는 일 뿐이라, 입 닫고 나를 보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내 책을 읽고 '불우한 어린시절'이라는 표현을 써준 나의 후배에게

불우는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라고,

언제 써야 할진 나도 잘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 써줄 필요는 없다고.

나는, 우리엄마 밑에서, 지난 32년을 사랑으로 잘 자라온 사람이라고. 엄마의 가장 큰 바람처럼, 세상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라고. 그런 나는, 우리엄마의 둘도 없는 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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