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은경 Oct 21. 2020

E12. 헬스장 패션왕


"운동복 대여 하실 건가요? 그럼 한 달에 만원 추가 되세요."

"아니요. 공용 운동복 필요 없어요."


헬스장 등록할 때면 묻는다.

남여 상의 색깔만 다르거나 어쩌다 전부 같은, 찜질복 모양의 반팔 반바지 대여 원하느냐고. 물론 예스,라 한다면 올때 마다 운동복 챙기는 수고스러움은 덜겠지만, 나는 거침없이 "놉!"이라 외친다. 만원 덜 내고 싶어 그런 건 절대아니고, 찜질복 입고 넘들 앞에 나서는 게 어쩐지 부끄럽기 때문이다.


아주 초기. 쪼쪼쪼렙일 때는 달랐다. 나만 튀는 대신 찜질복 부대에 묻혀가고 싶었다. 아무도 내가 나라는 걸 모르게, 어제 오늘 왔다간 회원중 하나로 여기게, 내일부터 나오지 않아도 궁금하지 않게. 그런 목표 달성을 위해 미디움 사이즈 대충 주워 입고 거울 앞에 서던 날이었더랬다. 그랬던 내가 개인 운동복 찾기 시작한 건 운동에 뽀링인럽(falling in love)하고 나서부터다. 제대로 하고싶다는 생각에 하루 날 잡아 나이키 매장에 방문하기에 이른다.


저스트두잇베이비

레깅스부터 사야겠다는 심사였다. 헬스장 누가 레깅스 입고 운동 하던데, 오우. 이거였다. 그때로 레깅스-쫄바지-에 꽂혔다. 매장에서도 레깅스 코너부터 찾았다. 몹시 비슷하면서 교묘하게 다른 레깅스가 즐비하다. 10부, 9부, 7부, 5부, 나이키 로고의 위치, NIKE 문구 유무, 시스루로 뚫린 부분이 있느냐 없느냐.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몇 쫄쫄이 만져보다 이런 생각이 든다.


'이걸 어떻게 입지?'


미취학 아동용으로 나온 건 아닐까,싶을 만큼 작디 작은, 이거 입으면 꽃 무늬 팬티까지 다 보이겠다,는 얇디 얇은 한 조각의 바지가. 심지어 7-8만원을 호가하고 있었다. 그래도 사고 싶었다. 찜질복 입는 일 어쩐지 불편해지더니, 어제는 쪽팔려 운동하기 싫다는 기분마저 들었으니까. 나만의 아이덴티티 갖춰 운동하고 싶다는 욕심에 가장 두껍고, 너무 비싸지 않으며, 적당히 길지 않은 레깅스 하나를 들고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쫄바지는 보기보다 더 작았다. 입는 즉시 찢어질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다리 하나 조심스레 집어 넣었는데, 오? 생각보다 잘 늘어난다. 쭉쭉 늘어나더니 감싸 안은 허벅지를 타이트하게 감아줬고, 심지어 뱃가죽까지 잡아줬다. 피팅룸 거울에 비친 나는, 제법 운동하는 여자 같다. 신이 난다. 곧장 바지로 갈아입어 탈의실 나온 후, 상의 하나도 추가로 골라 보기로 한다. 촤촤촤촤촤- 앗, 핫핑크 이게 좋겠다! 서둘러 피팅룸에 들어가고, 이번엔 레깅스와 상의를 모두 입고 나오기로 한다. 밖에 기다리고 있던 동생의 반응이 기다려진다. 기대해라.


"어때?"

"지가 무슨 김연아인줄 알아."


타이트하게 붙는 후디에 벙어리 장갑마냥 엄지 손가락만 따로 빼 입을 수 있는(*소매 핑거홀) 운동복 입고 나온 내게 그랬다. 그러나 내 기분 마치 연아, 기분이다 싶어 레깅스와 후디 하나를 질렀다. 뭘 샀다고 15만원이나 긁혔지만, 다음날 헬스장 가는 일이 기다려 진다. 새로 산 꼬까옷 내보이고 싶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내게 솟는다.



꼬까옷 둘러 입고 탈의실을 나온다. 고스란히 드러나는 몸매로 하는 대중시설 이용은 처음이라 몸 (어디)둘바 모르겠지만, 곧 익숙해져 나만의 런웨이가 시작된다.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다. 여자들 질투의 시선을, 남자들 쟤 누구야,의 시선을. 갓 찜질복에서 벗어나 처음 느낀 눈빛이기에 아직 어색하지만 이내 즐기기 시작한다. 거울에 비친 내게서 제법 운동녀 테가 난다. 좋아. 스미스 머신에서 스쾃 50개를 하고 웨이트 트레이닝 존에 간다. 덤벨 몇 개를 들다 말고 다시 사이클로 향한다. 정수기로 가 물 한 모금도 마신다. 괜히 사방을 돌아다니고 싶은 날이다. 뽐내고 싶은 날이다.


그런 내 옆으로 여성 하나가 지나간다. 등 근육 사이로 드러난 아이보리 나시, 와인색의 긴 레깅스, 그리고 얹어 신은 3줄짜리 스포츠 양말. 새삥 티가 줄줄 난다. 운동화까지 지른듯 한데, 목에 금 체인만 없을 뿐. 제대로 플렉스다. 그녀 몰래 시선을 흘긴다. 한 번 힐끗, 두 번 힐끗. 그러다 후회가 밀려 온다. 조금 더 지를 걸, 나도 아디다스 양말 신고 올걸. 다음엔 더 예쁜 운동복으로 나타날테다. 둘 만의 런웨이다.



흑백 필름처럼 그때가 스친다.

운동복 사 입은 다음 날이면 어쩐지 운동이 잘 되 한참 사재끼던 때를 지나 상의 찜질복, 하의 레깅스 패션으로 리턴이다. 7년의 세월이 그렇다. 만사 귀찮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운동만 잘 하면 되는 거슬. 그러다 꼬까옷 사 입고 등장한 안 땀내나는 여성을 보며 헬스장 영감이 된 나는 생각한다.


"좋을(한참 지를) 때다."

작가의 이전글 E11. 그뉵있는 녀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