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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경 Dec 21. 2020

나를 뺀 나머지 전부는 당신이 먼저에요.

재택근무 중이다.

출근 시간에 맞춰 일어나 밀린 설거지를 하고, 쌓아둔 빨래를 돌린다. 재택근무 하라고 하여 하는 나의 “재택근무”다. 집에서 하는 일이 무어겠어, 살림이지.


내가 다니는 곳의 재택근무는 다른 곳의 것과 개념이 상이하다.

기업 이윤을 위해 일하는 위치가 단지 회사, 또는 단지 집, 이런 게 아니라 약간 당직근무제 느낌이 강하다. 직원 3분의 1만 출근하고 나머지는 집에 머물 되, 일은 출근자가 도맡아 할 것. 고로 격일 당직제가 더 적합한 말일지 모른다. 최대한 뭉치지 마라, 라는 코로나 방침의 우리 회사 버전이다.


심보가 못 되어 결근하는 날이면 나의 소중함을 좀 느껴 보세요, 하는 흥칫뿡이 튀어나온다. 알 건 좀 알아야 돼, 이런 마음이랄까. 어제, 그러니까 출근 날 나는 손가락이 동 나 버릴 정도로 바빴다. 점심도 늦춰 먹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나만 동동거렸다. 회사 일임에도 나만 관여하고 있다는 철철한 느낌에, 나는 더 바빴다. 이해 해보려 했다. 내가 주 담당자이기도 하고, 공부가 필요하지만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동안 루팡도 많이 했으니 이번엔 제대로 월급 값 하자, 라는 다양한 심상을 마음에 그렸다. 그럼에도 화는 쑥-하고 차오르기를 반복했다. 아니, 나만 여기 일해? 미친 듯이 바쁜 거 빤히 보이면서 어째 도와주겠다는 말 한 마디를 안 해? 이거 회사 일 맞아? 나만 여기 직원이야? 뭐 이런. 욱하고 올라오는 성질머리와 이를 진정시키려는 나 vs 나 사이 피곤한 하루였다.


극과 극의 하루가 만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찾아왔다. 오늘은 좀 편-하게 재택근무 중이다. 그럴 자격 있는 오늘 같다. 살림엔 젬병이지만, 노동의 신성함은 때로 즐길 만하다. 떡진 머리에 삔 하나 꼽고 하는 잠옷 차림의 근무가 아-주 가끔, 극 가끔 괜찮은 거 같기도 하다. 평일 한 낮, 여유 있게 글 쓸 시간이 생겨 더 그렇다.


어제, 치열히도 보낸 날, 나의 남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너는 너를 먼저 생각하는 때가 언제야?”


음과 음을 반복했다. 음, 그리고 음. 한참을 망설인 걸 보니 나는 대부분 남이 먼저였나 보다, 생각했다. 아마 내가 먼저인 게 훨 많겠지만 대번에 기억나지 않는 걸 보니 그렇다. 나 좀 착한가, 괜찮은데, 그래서 나한테 타존이 높다 하는 건가, 거참. 촤하. 취해있다 불쑥 하나가 떠오른다. 물음을 받으면 꼭 무어라도 물어줘야 할 것 같은 압박이 있는데, 잘 되었다.


“있어! 내가 음식 제안할 때, 예를 들어 우리 부대찌개 먹을래? 이런 거! 나 먼저 생각해서 하는 행동이야!”


그게 그거 맞냐며, 우문똥답 하는 나를 보더니 “아, 그런가?” 해준다.


한때 <행복한 이기주의자>라는 책을 선물받기도 한 나다.

이기적이라 참 좋겠다, 행복해 보여, 그런데 난 그런 네가 별로, 라는 마산출신 대학 동기의 치기어린 선물이었다. 선물이었지만 기분은 떫었다. 고맙다, 는 말과 함께 그대로 책장에 내다 꽂았다.


학부 내 함께 깔깔대던 친구였다. 마산 특유의 사투리, 강인함, 막나감 따위가 한데 섞여 통쾌한 웃음을 가진 아이였다. 드센 편이었지만 나쁜 아이는 아니었고, 그래도 의리가 있어 의리를 상당히 중시했다는 기억이 있다. 문제도 있었다. 때문에 항상 몰려다녀야 했고, 빠지고 싶어도 빠질 수 없었고, 마시기 싫어도 마셔야 했다. 친구가 먼저라면 그래야 하는 게 걔 지론이었다.


믿을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대학생 때 까지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

별로 맛이 없었고, 취한 내 모습도 싫었고, 숙취는 더욱 힘들었다. 아마.

그런 나에게 마산 동기의 빠짐없는 술자리 참석 권유는 굉장히 고단했다. 확신.


몇 번은 속을 비추었던 거 같다. 오늘은 빠지겠다, 너무 피곤하다, 시험공부를 해야 한다. 진실일 때도 있었지만 거짓일 때도 물론 있었다. 거절을 되풀이 하는 나를 보고 그 아이가 한 말은 이기주의자였다. 너는 너만 생각 하냐고, 같이 모이자는 데 꼭 그래야겠냐고. 서울깍쟁이는 이래서 별로라고. 그 아이 눈에 비친 나는 서울 깍쟁이었다. 난 경기도 출신인데. 걔의 말이 맞다면 나는 나를 먼저 생각하는 서울 깍쟁이었다. 이기주의자였다. 아주 아주 너를 먼저 생각하다 더는 내가 지쳐 어렵게 꺼낸 말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본인 가치관이 정답이라던 그 친구는, 이기주의와 한껏 어울리는 사람은 정작 자신이라는 건 전혀 모르는 눈치다.


그런 나도 있었는데, 어제는 왜 그리 머뭇거렸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10년 전 그때를 회고하는 순간, 갑자기 내가 우선이 되는 무언가가 마구 떠오른다. 어제는 미쳐 대답해 주지 못했는데 오늘 말해줄까 보다. 퇴근 후면 오직 나의 휴식을 위해 누구의 연락도 받지 않으려 하고, 시간 쏟고 싶지 않은 사람과 하는 만남은 가급적 잡지 않고, 아직 흥이 남아 있는 술자리 당신이지만 더는 마시고 싶지 않을 땐 과감히 집에 가겠다고 말을 하고, 사랑이 없어진 당신에게 내가 먼저 이별을 고하고. 이렇게나 이기적인 나라는 걸.

하지만 나를 뺀 전부는 당신이 먼저라는 것도 알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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