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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경 Mar 05. 2021

#트리플 크라운_제1화 : 공대 아름이가 되었다.

실화에 기반한 소오설

공과대를 나왔다. 여학생과 남학생 비율로 15:85인 대학이었다. 나 하나를 주변으로 남자애 오점 칠 명이 득실거린 꼴이다. 여학생 입학 정원은 보기 좋게 학교에서 정해준 거였다. 이마저 이십 년도 더 된 그때에 비하면 나아진 건데, 당시엔 여학생 전교 한 명이었다나. 그 언니 학교 어떻게 다녔을지 상당히 궁금할 뿐이다. 그렇게 “희소”라는 모습을 한 채 눈곱도 못 뗀 얼굴로 함께 구보하고, 팔 굽혀 펴기 63회를 하고, 서로를 “동기”라 부르던, 그런 곳에 4년을 살아냈다. 웨이트 존에서도 아무 의식 없이 들고 쪼고 하는 나는, 대학 4년간 남탕에 익숙해진 덕인지 모른다. 어쩌면 그보다 전부터.


고2, 이과를 택한 후 부터 남자사람친구가 드글한 삶이었다.

여자애들 대부분은 문과를 지원했다. 아무래도 논리로 딱 떨어지는 답보다 서정으로 채우는 갬성 문학이 더 맞았던 거 같다. 나랑은 좀 반대였다. 나는 수학의 명쾌함이 좋았다. 웬만한 주관식 답은 0 아니면 1, 그도 아님 무한대, 셋 중 하나인 게 마음에 들기도 했고, 무엇보다 국어가 너-무 싫었다. 시험지 반바닥을 차지하는 글만 보면 금세 눈앞이 캄캄해 지곤 했으니까. 대놓고 짝사랑했던 국사 선생님 포기하고 이과로 갈 만큼, 국어, 사회는 제대로 별로였(던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심지어 잘하고 싶어 글에 욕심도 투영한)다.


그때로 나는 남탕에 지내게 된다. 걔나 나나 발가벗지만 않았을 뿐이다. 반장이던 나를 부르는 대부분은 경우와 규현이, 유덕이었고, 내 복습을 위해 공부 가르쳐 준 애는 짝꿍 우상이었고, 야자 후 문자 보내던 건 찬웅이었다. 얘들 없인 살 수 없는 환경이었다. (문득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아주 몹시 매우 되바라질 만큼 순수하던 나는, 수학 선생의 시그니처 제스처를 잘못 따라해 남자애들의 놀림이 된 일이 있다. 절묘하게 성행위를 묘사한 손가락이었던 것이다. 그 무엇도 몰랐던 성(性)백치 쟈스민은 때로 사춘기 남자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진짜 몰라서 그런 거 맞냐는 친구 놈도 있었다. 미친놈) 당연히 공부만 했다 자부할 수 있는 나는, 숱한 기회 속에도 연애는 하지 않았다. 그 공과대에 반드시 합격해야 했기 때문이다.


끝내 이루었다.

합격자 발표 날, 모니터에 찍힌 빨간색 두 글자 “합격”을 아직 잊지 못한다. 열여덟 인생에 가장 큰 성취를 느낀 날, 그 날로 내 꿈이 바뀌었다. 남자친구 사귀고 싶다. 그리고 아주 쉽게, 어린 나의 뜻대로 되었다.


햇병아리 나는, 여기서 되도 않는 주목을 받게 된다. 대단한 미모라 그런 건 절대 아니고, 월등한 기럭지라 그런 건 더더욱 아니었다. 단지 15%에 속하는 “하나”라는 이유뿐이었다. 여긴 가슴 나온 전부가 관심의 대상이 된다. 알린 일 없던 우리를 오빠라는 족속은 전부 캐고 있었다. 심지어 입학 전부터였다. 가입한 동기 카페에서 나는 (무려)5명의 오빠로부터 연락 받기도 했다. 태도야 다분히 정의로웠다. 학교 소개를 해주마, 저녁 시간 어떻니, 파스타 좋아하니, 혹시 이 영화는 봤는지 오빠가 참 궁금하네.


나는 입학과 동시에 공대 아름이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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