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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경 May 13. 2022

낮술이 안 깬다

지난 주에 쓴 글

잘 갔다와.     



웃는 얼굴로 남편을 배웅하고 들어와 맥주 한 캔을 땄다. 핸드폰은 오전 8시 20분을 알렸고, 다음 스케쥴은 밤 9시였다. 마실 법도 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덜렁 맥주만 마실 순 없어 아침 겸 안주를 찾아 냉장고를 열었다. 지난 주말 사둔 양배추 반 덩어리, 오이고추, 상추, 노랗고 붉은 파프리카, 오이, 당근, 명이나물…. 차례로 냉동실을 열었다.     



간밤은 긴 밤이었다.

유독 잠이 오지 않는 날이 있다. 하루를 거꾸로 들어 탈탈 털어 보며 뭘 했기에 이렇게 잠이 안 올까, 커피를 많이 마셔 그런가, 싶은 유별난 날. 어제는 운동도 했고, 밤 10시가 다 되어 가래떡 한 가닥을 구워 먹기도 했고, 그러니까 배부르고 피곤해 충분히 잘만한 조건이었음에도 두 눈엔 생기가 돈다. 시들지 말라고 방부제라도 쳐둔 것처럼 곧게 선 정신은 자정이 지나도록 움츠러들지 않는다. 밤이 늦도록 멀쩡한 정신은 이따금 조바심이 되기도 한다. 자야지, 자야지, 자야하는데, 따위가 나를 괴롭힌다.     



곧 잠에 들길 바리며 누워 하릴이라면 전자책을 보거나 유튜브를 보는 일, ‘누워 보는 일’ 따위다. 새벽 1시, 독서가 지루해져 유튜브 ‘먹보스 쭈엽이’를 틀었다. 요즘 전 운동선수들의 예능 활약이 쉽게 눈에 띈다. ‘먹보스 쭈엽이’는 타이틀 그대로 먹보(스) 현주엽씨가 먹방하는 영상이다. 영상은 대충 이렇다. 고기 3인분이 영상에서 금세 사라진다. 그것으로 부족한지 그는 3인분을 추가한다. 여전히 위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더 시키기고 싶지만 예산 때문인지 pd 눈치를 본다. 나는 그런 쭈엽이를 보고 있다.     



생각했다. 현주엽씨네 집은 식비 장난 없겠다. 고기를 주로 먹고 그것도 한 끼에 소고기 6인분을 먹다니. 먹을 때만큼은 저리도 행복해하는 매직히포((47‧195cm‧고려대)라 말릴 수도 없겠다. 그나저나 소고기 1인분이 얼마쯤 하지. 고기와 깨나 멀어진 요즘이라 더 아련하게만 느껴진다. 그리고 궁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레 풀렸다. 영상 후반쯤 되자 pd가 말했다. 이번 고기만 100만원쯤 나온 듯합니다. 왼쪽으로 누워 있던 나는 ‘헉!’하고 허공에 기염을 토해 남편을 깨우고야 말았고, 미안하다는 뜻으로 조용히 입을 틀어막았다. 100만원이면 우리 집 생활비 절반이었다. 그렇게 먹보스 쭈엽이는 우리 집 통장 잔고를 살피게 했다. 항상 전개는 이런 식이다.     





이달 초부터 퇴직금을 적당히 깎아 먹으며 사는 추세다. 소득(+)이 지출(-)보다 적으면 그렇게 된다. 서울 사는 2인 가족 치고 지출이 몹시 작은 편임에도 소득이 그보다 더 작으면 그럴 수 있다. 성실한 살림꾼은 아니므로 얼마를 더 썼는지는 (관심 부족으로)잘 모른다. 허나 야금야금 숫자가 줄어가는 건 느껴진다. 나는 거진 느낌에 따르는 편이다. 그러나 줄어드는 숫자는 몸무게에 한해 기쁨일 뿐, 이자에 한해 반가울 뿐, 바닥에 닿으려는 잔고를 가뿐히 여길 순 없는 노릇이다. 이대로 줄어들도록 손 놓고 지켜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레 플러스 거리들을 떠올렸다. 일단 이번 달 소득은 수강생이 더 늘지 않는 한, 없다. 그리고 더 떠오르지 않는다. 혹시 숨겨둔 금은보화라도 없을까, 잊고 지내던 적금 따위는, 빌려준 돈은… 샅샅이 뒤져 보지만 없다. 또 깎아 먹게 생겼다.     



생각이 잠식당하는 건 시간문제다. 마이너스가 마이너스의 꼬리를 물어, 건강하고도 긍정적인 나의 정신을 애벌레 사과 먹듯 갉아 먹기 시작했다. 덜컥 겁과 비슷한 감정이 내면을 물들였다. 계획한 일이 번창하고, 확장하고, 잘 될 것보다 어긋남으로 고개를 튼 게, 모두 생각 때문이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건 죽기보다 싫다. 퇴사하며 가장 두려웠던 건 ‘다시 돌아올지 모를 나’였다. 해보니 안 되겠더이다, 당신들이 지닌 기득권에 굴복하며 살아야겠더이다, 시부렁. 정말 지고 싶지 않았는데, 되돌아오고 싶지 않았는데 안면 몰수하고 아무 일 없던 척 돌아와야 했더이다. 그게 나는 무섭다.     





그렇게 쭈엽이를 보다 드라마 한 편을 찍었나 보다. 영상을 바꿔 틀어 어둠을 환기시키기로 했다. 그알(그것이 알고 싶다) 홍전강 사건을 클릭해 본다. 살인사건보다야 회사로 되돌아가는 게 덜 무서운 일일 거라는 확신을 한다. 그러다 점점 pd 얼굴이 희미해진다. 꿈을 꿨다. 꿈에는 웬 개가 하나 나왔다. 살인마가 아무 연고도 없이 동네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이는 동안 살인마를 향해 그 개가 실컷 짖어댔다. 왈왈(꺼져!). 그리고 기억에 나지 않는다.     



아픈 잠을 자고 난 뒤, 아침이 왔다. 간밤에 물고 늘어진 알싸한 사념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기분이 엉켜있다. 게다가 미국 주식에 발톱(지금 우리에겐 티라노 발톱)만큼 담가둔 투자금이 자그마치 –20%를 찍어버린 바람에 갱장히 맥주를 마셔야 한다. 부랴부랴 남편부터 보내고 마땅히 먹고 싶은 것도, 먹을 것도 없어 찾은 건 냉동실에 있던 비건 김치만두. 서둘러 프라이팬을 불 위에 올리고 만두 6개를 3열 종대로 줄 세워 구웠다. 355ml짜리 아기 맥주 한 캔에 만두 6조각을 먹고 나니 배도 부른 것이 알딸딸하다. 시시콜콜한 아침이 흘러간다.     



그리고 오후 2시. 지독한 낮술 놈. 취기가 가시지 않는다. 커피를 마셔도, 입안에 사탕을 넣고 이리 저리 굴려보아도 멍텅하다. 이 작은 맥주 하나도 분해 못 할 망할 낮에 한 술. 낮술은 무섭고 어둠이 만든 생각은 불결하다.     



그러나 아무래도 글 쓰는 직업은 멋진 것 같다. 수익보다 지출이 많음을 이토록 그럴싸하게 표현하는 건 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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