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야크 섬&산 41좌
2019년 3월, 등린이 시절에 사량도에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량도는 경치가 아름답지만, 굉장히 험하다고 들었습니다. 무리하기 싫어서, 일부러 가지 않았습니다. 언젠간 가겠지 싶었고, 우선순위가 아니어서 굳이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간 사량도에 갈 기회가 통 없었습니다. 2023년 1월, 섬 산행을 하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냈습니다. 한 달 내내 열심히 통영에 드나들었습니다. 이제 사량도의 인증지 두 곳과 두미도만 가면, 통영의 섬 인증지는 완료 합니다.
원래 두미도에 먼저 가려고 했으나, 예기치 못한 사건이 하나 터졌습니다. 3시에 집을 나서려는데, 한파 탓에 자동차 시동이 켜지지 않았습니다. 다급한 마음으로 보험사에 연락해 배터리를 충전했습니다. 통영항에 06:30까지 도착해야 여유롭게 두미도행 배를 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약 30분가량 시간을 까먹은 후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통영항보다 가까운 가오치항으로 향했습니다. 7시 배를 탔습니다.
해가 두둥실 떠올랐습니다. 날씨는 화창했습니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기분만은 유쾌했습니다. 드디어, 사량도에 닿았습니다. 여자 셋이 온 무리가 있었으나, 소란스러워 보여서 일부러 피했습니다.
인터넷에서 등산객들이 공유한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대부분의 방문자들은 금평항에서 07:50에 버스를 타고, 수우도 전망대에서 하차합니다. 돌산을 오르면 정상인 지리산에 금세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구체적인 설명은 블로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사량면사무소를 지났습니다.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 마주 보며 끽연 중이었습니다.
"지리산 가려는데, 어디로 가면 되나요?"
그러자, 한 명이 당황하며 대답했습니다.
"아, 아직 발령받은 지 얼마 안 돼서, 가보진 않았는데 저 쪽일 거예요."
굳이 묻지도 않은 정보를 그는 늘어놓았습니다.
'어차피 등산할 생각도 없으면서. 새해인데, 금연이나 좀 하지.'
사량도에는 두 대의 버스가 있습니다. 한 대는 상도를 시계 방향으로 주행하고, 다른 한 대는 하도를 반시계 방향으로 운행합니다.
배차 간격은 1시간입니다.
"여기서 수우도 전망대까지 걸어가면 오래 걸릴까요?"
편의점 아주머니에게 질문하자, 무뚝뚝한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한 시간은 꼬박 걸려요."
여자 혼자 왜 섬에 왔지, 하는 듯한 의심의 눈초리였습니다.
애초에 상도와 하도를 모두 둘러볼 계획이었으므로,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옥녀봉부터 등산을 시작했습니다. 주변은 고요했고, 인적이 없었습니다. 하늘을, 바다를, 산을 오로지 독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꽁꽁 싸매고 있던 겉옷을 하나씩 벗었습니다. 모자도 벗고, 장갑도 벗었습니다. 옥녀봉을 지났습니다. 휴대전화에서 지도를 보며 방향을 가늠했습니다.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겠지?'
누구 물어볼 이 하나 없어서, 내내 불안했습니다. 흔들 다리에서 만난 해풍은 유독 심술궂었습니다.
'설마, 여기서 떨어지는 건 아니겠지?'
혹여 위험에 쳐해도,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상대조차 전혀 없었습니다.'
옥녀봉을 지나 경사가 수직에 가까운 철계단을 발견했습니다. 그 옆에는 야영 및 취사 금지라는 경고 안내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 사량면사무소에 문의하니, 과태료가 30만 원 미만이라고 했습니다. 넘어질까 봐 조심하며, 엉금엉금 네 다리로 기어 계단을 지났습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서 올랐던 계단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가마봉을 들렸습니다. 지리산까지 가는 길은 멀었습니다. 아직 지리산은 한참 남았습니다. 섬이라고 해서, 높이가 낮은 산이라고 해서 다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혼자여서 외롭고, 추워서 더 멀게만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잠시 쉬며 귤 두 개를 까먹고, 부지런히 걸었습니다.
달의 형상을 닮아 달바위라고 부른다는 바위를 만났습니다.
'전혀 달 같지 않은데?'
과거에는 달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현재 모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마, 오랜 세월 동안 형태가 변형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침내, 지리산에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해냈어!'
감격에 겨웠습니다. 정상석과 내 모습을 한 화면에 담으려고 노력했으나, 정상석이 너무 낮아서 한참 애먹었습니다. 정오의 햇살은 뜨겁고 눈부셔서, 오래 촬영하기 힘들었습니다. 사진 속 여자는 이마와 코, 두 뺨이 상기된 모습이었지만, 즐거워 보였습니다.
종주를 마치고 수우도 전망대로 하산하는데, 굉장히 험했습니다. 사량도 지리산을 왜 험하다고 하는지, 그제야 이해가 갔습니다.
'여기서부터 등산했음 훨씬 더 고생했겠네! 어, 근데 여기 길 맞는 거야?'
위험 구간이라는 경고 이정표가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그럼 그렇지... 우회로를 찾아보자. 여기서 발이라도 헛디디면 끝장이야!'
말라비틀어진 고사리들이 돌바닥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습니다.
'휴, 여기서라도 살아보겠다고 붙어 있는 걸 보니, 안쓰럽네.'
어디선가 낮고 부드러운 곡조가 들렸습니다.
'응? 인근에 절이 있나?'
고개를 들어 소리의 출처를 찾으니, 스테인리스 기둥이 하나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균일한 간격으로 뚫린 구멍 몇 개를 바람이 쉴 새 없이 드나들며 연주 중이었습니다.
"뭐야, 이게 악기였어? 어머나!"
기가 막혀서 그만 혼잣말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무사히 하산을 마쳤습니다. 13시였습니다. 8시부터 등산했으니, 총 다섯 시간이 걸렸습니다. 수우대 전망대에서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자가용 두 대와, 오토바이 두 대가 지나갔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았습니다. 사량면사무소에 전화해 문의했더니, 버스는 14시에 올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마냥 기다릴 순 없었습니다. 하도에 가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택시를 탈까 싶어 콜밴 기사에게 전화했습니다.
"여기 수우대 전망대인데, 금평항까지 얼마면 갈 수 있을까요?"
"20,000원이요."
"저 혼자인데, 너무 비싸네요. 현금드릴 테니, 좀 깎아주시면 안 될까요?"
"안 됩니다."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습니다.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습니다. 돈지 마을에 닿았습니다. 무릎이 아파서, 더 못 걸을 것 같았습니다. 점심을 제대로 못 먹어서, 잔뜩 굶주렸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며, 배낭에서 간식을 꺼내 먹었습니다. 콜밴 기사에게 다시 전화했습니다.
"오전에 지리산 다녀왔는데, 칠현봉까지 갔다 배 타고 육지로 나갈 수 있을까요?"
"가능하죠."
하지만, 수화기 너머 들리는 음성은 확신이 부족했습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할머니에게 같은 질문을 하자, 그녀는 만류했습니다. 무리하면 몸이 상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할머니의 조언을 듣고 보니, 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등산하면서 몸 다치고 건강 잃으면, 결국 손해입니다. 운 좋게 귀인을 만나서, 마음을 고쳐 먹었습니다. 금평항행 버스를 탔습니다. 고작 900원이었습니다. 저렴합니다. 16시 배를 타고, 무사히 뭍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오치항에 도착하자, 50대로 보이는 남성이 다가와 말을 건넸습니다.
"혼자 오셨어요?"
"네."
"대단하시네요!"
두 눈동자는 경이감이 묻어 있었습니다.
"아, 너무 힘들었어요! 몇 명이서 오셨어요?"
"저희는 남자 셋이요. 1박 2일 하려고요."
'내가 거기 끼면, 딱인데!'
평소 같았으면 위와 같이 농담도 던졌겠지만, 그럴 마음의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