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야크 섬&산 42좌
사람들은 의외로 자기가 사는 고장을 둘러보지 않습니다.
"거기 가봤어요?"
하고 물으면, 대부분 심드렁하게 대답합니다.
"여기 살긴 하는데, 굳이 시간 내서 거기까지 가보진 않았어요. 거기 뭐 볼 게 있나요? 관광객들이나 놀러 오는 거죠."
다들 먹고살기 바빠서, 여유가 없습니다. 여유 없긴 매한가지지만, 없는 시간 쪼개고 부족한 자금 끌어모아 세상을 두루 살펴보고 있습니다.
통영 사량도(상) 지리산 정상에 다다랐을 때, 전라인으로부터 연락이 와있었습니다. 그는 2월 말에 함께 섬 산행을 가기로 약속한 상대인데, 어쩐 일인지 갑자기 내일 등산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예전에도 그와 덕유산 지봉에 가려고 했으나, 폭설로 인해 연기됐습니다. 그래서, 그와 여태 초면입니다.
토요일, 전라인과 통영 두미도에 가기로 했습니다. 숙소에서 출발하기 전, 전화로 출항 여부를 문의했습니다.
"두미도 정상 출발하나요?"
"네, 갑니다."
숙소에서 여유롭게 출발했습니다. 통영항까지 걸어서 금방입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 문제가 생겼습니다. 등산 배낭, 스틱, 모자, 장갑 다 챙겼는데 오직 딱 하나를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등산화! 평소에 신던 운동화를 등산화로 갈아 신지 않고 그냥 와버렸습니다.
'으악!'
전라인에게 전화해 좀 늦는다고 설명하고, 부리나케 숙소로 뛰어갔습니다. 무거운 짐을 이고 뛰려니, 금세 지쳤습니다.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괴로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등산화로 갈아 신고 통영항에 도착했습니다.
다행히, 많이 늦진 않았습니다. 동행에게 전화했습니다.
"저 도착했어요. 손 좀 들어주세요."
K는 키가 크고 듬직한 인상이었습니다. 사진으로 본모습과는 영 딴판이었습니다.
"두미도행 두 명이요."
"가는 배는 정상 출발하는데, 돌아올 때 결항될 수도 있어요."
직원이 안내했습니다.
"네? 아까 전화했을 땐 그런 말 없었는데......"
황당했습니다.
"확률은 반반이에요. 오전엔 기상이 괜찮은데, 오후엔 못 돌아올 수도 있어요. 판단은 손님 몫이죠."
옆자리에 앉은 다른 직원이 거들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K에게 물었습니다.
"전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그는 덤덤했습니다.
'초면인 남자랑 섬에서 발이 묶일 순 없어. 난 안 괜찮아!'
차선책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잠깐 전화 좀 할게요. 여보세요? 사량도 가는 배 정상 운행하나요? 통영항은 결항됐어요. 아, 거긴 괜찮다고요? 네, 그럼 9시 배 탈게요."
다행이었습니다. 그나마 가오치항은 문제없어 보였습니다.
"가오치항은 여기서 약 15km 거리예요. 거기서 사량도에 가요! 마침, 어제 하도를 못 갔거든요. 오늘 마저 인증해야겠어요. 두미도는 다음에 가야죠. 내일도 역시 일정이 있어서, 섬에 갇히면 곤란해요."
각자 주행해서, 가오치항에서 재회했습니다. K의 눈은 충혈됐습니다.
"9시 배 타기 전에, 차에서 눈 좀 붙이고 오세요. 저는 여기서 독서하고 있을게요. 실내가 따뜻하거든요."
그는 별 이견 없이 따랐습니다.
혼자 남은 시간에 부지런히 사량도 하도 칠현봉에 대해 검색했습니다. 상도 지리산에 비해 별로 알려지진 않았으나, 사량 대교를 근거리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8시가 넘자, 관광객들이 밀려들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통영항에서 소매물도 가는 배가 결항됐다고 합니다. 몇 주 전, 통영항 소매물도행 배가 결항돼서 거제 저구항에서 가까스로 갔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거제 저구항에서 가는 배 타지 그러셨어요?"
"대장님이 알아서 할 일이죠. 그냥, 따라왔어요."
산악회에서 약 20명이 단체로 왔다고 했습니다.
"이따 저녁에 통영항에서 뒤풀이 어때요?"
한 남자 회원이 내게 제안했습니다.
"숙소가 통영항이긴 한데......"
그때, K가 곁에 앉았습니다.
"일행이 있어서요."
다행히, 완곡히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선실 내의 바닥에 K와 나란히 누웠습니다. 뜨끈뜨끈 온기에 몸을 맡겼습니다. K는 많이 피곤했는지, 눕자마자 코를 골았습니다.
'아, 시끄러워...... 때릴 수도 없고!'
약 40분 후, 금평항에 도착했습니다.
'사량도에서 사랑합시다'라고 써진 비석 앞에 섰습니다. 어제는 사진 촬영을 부탁할 이가 아무도 없어서, 그냥 지나쳤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함께 하는 이가 있기에 당당히 촬영할 수 있었습니다. K도 처음엔 거절하더니, 내가 시범을 먼저 보이자 자기도 찍어 달라며 나섰습니다.
"우리 둘도 같이 찍어요!"
초면인 이성과 연인 행세(?)하며 즐겁게 손 하트를 그렸습니다. 어제는 혼자여서 외로웠지만, 오늘은 둘이어서 유쾌했습니다.
사량 대교를 지나 등산을 시작했습니다. 미리 검색한 자료들 덕분에, 들머리를 찾기 수월했습니다. 지도상에서는 상도 지리산보다 하도 칠현봉의 거리가 비교적 짧아 보였지만, 여기도 약 5시간이나 걸립니다. 나뭇가지가 무성해서, 사량 대교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찍은 사진 보면, 시야가 탁 트였던데...... 지금은 영 안 보이네요."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경치 좋아요. 이순신 장군이 떠오르네요. 그, 뭐였지? 학 모양의 그......"
K가 기억을 더듬었으나,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학익진이요?"
거들었습니다.
"맞아, 학익진! 한국의 존경하는 3대 인물 중, 한 명이 이순신 장군이거든요."
"음, 다른 인물은 세종대왕?"
"맞아요! 세종대왕도 그중 한 명이죠."
"그럼, 다른 인물은? 안중근 의사?"
"아뇨, 장영실이요. 과학자!"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어느덧,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귤, 한과, 충무 김밥을 나눠 먹었습니다.
"배가 불러서, 점심은 안 먹어도 되겠는데요?"
그간 해산물을 지겹도록 먹은 터라, 굳이 맛집에 갈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덕동으로 하산했습니다. 굉장히 험했습니다. 하지만, 짧아서 좋았습니다. 덕동여객터미널에서 금평항을 경유해 통영으로 돌아갑니다. 한낮의 기온은 영상이지만, 일교차가 커서 화장실 변기의 물이 그만 얼어 있었습니다. 실례를 했으나, 물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가오치가 무슨 뜻이에요?"
뱃사람에게 질문했습니다.
"다섯 개의 동네 가운데라는 뜻이에요."
의미가 있다고 하니, 하나 배워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가오리랑 연관이 있나 했네."
K가 말했습니다.
배에 타자, 그는 또 정신없이 잠들었습니다.
본인이 코를 고는 걸, 전혀 모르나 봅니다.
'아, 시끄러워...... 깨울 수도 없고!'
가오치항으로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비록 두미도는 세 번이나 실패했지만, 잠시나마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어서 만족스럽습니다.
통영 두미도 가실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