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야크 섬&산 47좌
통영에서 처음으로 묵었던 게스트하우스는 저렴하지만, 방음이 엉망이었다. 옆 방에서 인기척이 들려서, 마치 타인과 한 공간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숙소에 짐을 두고 온 걸 귀가한 후에서야 깨닫고 황당했습니다. 숙소 주인에게 전화해 문의하니, 답변이 가관이었습니다.
"혹시, 거기 제 짐 있나요?"
"네, 있어요."
"짐을 두고 온 걸 귀가한 후에나 알았네요! 왜 안 알려 주셨어요?"
"다시 찾으러 올 줄 알고, 연락 안 했죠."
"네? 오전에 퇴실하는 체계인데, 그럴 리가 있나요? 짐을 보관하겠다고 부탁한 것도 아니었잖아요. 짐이 남아 있으면, 전화 한 통만 해주지 그러셨어요! 새벽에 부랴부랴 배 타러 나가느라, 짐을 두고 온 걸 미처 몰랐어요. 물건을 잘 챙기지 못한 건 본인 잘못이지만, 연락해서 알려주셨어야죠. 운영자시잖아요!"
어차피 가야 하는 여정이니, 택배로 부쳐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부탁하고 싶지도 않았고, 택배비가 아까웠기 때문이었습니다.
1월 내내 통영에 갔고, 총 여덟 개의 섬을 다녀왔습니다. 주말마다 섬 두 개씩 꼬박꼬박 다녀온 셈입니다. 그런데, 통영에서 귀가하는 고속도로에서 과속 과태료 고지서가 발급됐습니다.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 걸 보니, 아마 깜빡 졸음운전을 중이었나 봅니다. 장거리 운전하느라 너무 피곤한데, 벌금까지 물어야 하다니 더 싫었습니다. 유류비, 통행료, 숙박비, 식대 그리고 승선료까지 합산하면 어마어마한 액수였습니다.
통영에 너무 자주 간 나머지, 이제 지겨웠습니다. 통영은 제발 그만 가고 싶었습니다. 허나, 아직 가지 못한 섬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바로, 통영 두미도였습니다. 배 시간을 맞추지 못해서 한 번, 돌아오는 배가 결항될 수도 있다고 해서 두 번, 다음날에도 같은 이유로 세 번. 그토록 두미도는 정말 가기 어려운 섬이었습니다. 떠나는 배 06:50, 돌아오는 배는 15:45. 이렇게 하루에 오직 한 대씩 뿐이었습니다.
토요일, 여수 바다를 감상하며 카페 모이핀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거제인 물줘가 곁에 있었습니다.
"내일 시간 있어?"
"사천으로 등산 가려고 했는데, 확인해 보니 이미 가본 곳이네요. 안 가려고요."
"그럼, 나랑 통영 두미도 가는 건 어때?"
"그럴까요."
원래 본가에 가야 했지만, 어머니와의 갈등으로 인해 일정이 취소됐습니다. 재빨리 통영항 인근 숙소를 검색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주말이라서 게스트하우스는 모두 예약 마감된 후였습니다. 모텔이나 호텔은 숙박비가 지나치게 과했습니다.
"하루 재워줄 수 있어? 빈 방 있지?"
물줘에게 넌지시 물었습니다.
"부모님이 계셔요. 빈 방이 있긴 한데, 난방을 안 해서 추워요. 일단, 아버지께 전화해서 허락 먼저 맡을게요."
그러나, 물줘의 아버지는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이따 전화 주시겠죠."
시간이 흘러도, 전화는 오지 않았습니다.
"나 어떡해?"
조바심이 났습니다.
"일단, 여수에서 출발해요 허락 안 맡고, 그냥 가도 돼요."
여수에서 통영까지 약 두 시간이 걸립니다. 각자 주행해서 통영에서 물줘와 재회했습니다.
"숙박비 대신, 저녁 내가 살게."
짬뽕을 먹고, 짐을 챙겨 물줘의 차에 탔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는 거제로 이동했습니다.
도착하니, 깜깜한 밤이었습니다. 워낙 외진 시골이라서, 인적이 없었습니다.
물줘와 처음 만난 게 지난달 15일, 그간 두 번 만났습니다. 이번이 세 번째 만남인데, 하룻밤 신세를 지려니 가시방석 같았습니다. 다행히 그의 부모님은 특별히 반응을 보이거나,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집이 낡았다고 흉만 안 보면, 하루 묵어가게 해 줄게요."
거실에서 어머니가 빨랫감을 개며 말했습니다.
"집 좋은데요."
거실을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애초에 계획하지 않은 터라, 여벌옷이 없었습니다. 물줘에게 옷을 빌려 입었습니다. 남자가 입던 옷을 입으려니, 민망했습니다. 물줘는 수면 잠옷을 입은 나를 보며 자꾸 놀렸습니다.
"옷이 잘 어울리는데요."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물줘는 자신의 방을 내게 내주고, 본인은 추운 거실에서 잤습니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자정에 깼습니다. 화장실에 한 번 다녀왔는데, 물줘가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말없이 이불속으로 쏙 들어와 뒤에서 허리를 안길래, 깜짝 놀랐습니다.
"이러지 마, 싫어!"
저항했습니다.
"잠깐만 있다 갈게요."
불편했습니다. 물줘는 잠시 후에 거실로 다시 나갔습니다.
'남의 집에 손님으로 와서, 방문을 잠글 수도 없고...... 어쩐담......'
불안해서 잠을 못 이룰 줄 알았는데, 곧 스르륵 잠이 들었습니다.
출발 두 시간 전부터 기상해서, 나갈 채비를 했습니다. 세수하고, 옷을 입고, 짐을 챙겼습니다. 물줘가 일어나서 물을 끓였습니다. 컵라면을 나눠 먹었습니다.
"누나는 원래 하루 세끼 다 먹어요?"
"응. 한 끼라도 굶으면 병 나. 예전에 그런 적 있어. 넌 하루에 두 끼만 먹어?"
"네. 아침은 안 먹어요."
"그럼, 뇌세포가 죽어."
여섯 시에 물줘네에서 출발했습니다. 통영 두미도의 배가 정상 출항하는지 문의하려고 전화했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습니다. 덜컥 겁이 났습니다.
'통영항까지 갔는데, 결항이라면 어쩌지? 불안한데......'
전화를 여러 통 했으나,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물줘는 통영항 주차장에 주차하지 않고, 도로변에 주차했습니다. 하차 후, 운동화를 벗고 등산화로 갈아 신었습니다.
"가서, 정상 출항하는지 물어보고 올게요."
물줘가 혼자 여객선 터미널로 들어갔다가 돌아왔습니다.
"배 간대요."
"오, 진짜? 가는 배, 오는 배 다 정상 출항이래?"
"네."
"빨리 가자!"
할인권 바다로를 적용하면, 승선권 할인을 받을 수 있어서 이득입니다. 그런데, 물줘는 바다로를 구매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거제시민인데, 할인 안 되나요?"
물줘가 질문했습니다.
"네, 안됩니다."
발권 직원이 대답했습니다.
"왜 구매 안 했어? 할인 못 받잖아."
안타까웠습니다.
"지난번 거제 저구항에선 되던데......"
"거긴 거제라서 할인됐나 보지. 여긴 통영이잖아. 너 차 안 옮길 거야? 주차 금지 구역 노란선인데, 과태료 고지서 나올 수도 있어. 여객선 터미널 주차비는 5천 원이야."
주차비는 까짓 거, 내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물줘가 머뭇거렸습니다. 그때, 전화가 왔습니다.
"여보세요?"
"빨리 나오세요. 출항합니다!"
검표 직원이었습니다.
"주차 다시 하고 오면 안 될까요?"
물줘가 직원에게 물었으나, 그는 재촉만 할 뿐이었습니다. 떠나는 배를 붙잡을 수 없으니, 불안한 마음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물줘는 재주차하지 못한 채 배에 올랐습니다. 그게 화근이었습니다.
통영 두미도 북구항에 도착했습니다. 천황봉에 오르는 이들은 우리 말고도 더 있었습니다. 60대 이상으로 보이는 부부 두 쌍이었습니다. 한 쌍은 울산, 다른 한 쌍은 삼천포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투구봉으로 등산을 시작했고, 우리는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인적이 드물었고, 목줄이 묶인 개들이 보였습니다. 우리를 보더니, 개들이 컹컹 짖어댔습니다. 시끄러웠습니다.
물줘에게 결혼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을 말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계약서를 쓰는 거야. 서로 원하는 항목을 조율해서, 계약서를 나눠 갖는 거지. 그리고, 계약 기간은 평생이 아니라, 유효 기간은 365일. 매년 결혼기념일이 다가올 거 아냐? 그때, 서로 별 말 없으면 계약 기간 자동 갱신되는 거고, 아니면 합의해서 이혼하는 거지."
그가 듣더니,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아, 이건 내 생각은 아니야. 결혼 안 해봐서 몰라. 책에서 읽었어. 설득력 있던데."
햇살이 따스했습니다. 무엇보다, 혼자가 아니라서 좋았습니다. 남구항을 향해 임도를 따라 약 한 시간 걸었습니다. 혹시 길을 잘못 들어 헤맬까 봐, 줄곧 긴장됐습니다.
이정표는 정비한 지 얼마 안 된 새것들이었습니다. 부서지거나 닳은 부분 없이 깔끔했고, 글씨도 선명했습니다. 등산로 정비도 잘 되어 있었습니다. 힘든 구간은 특별히 없었으나, 금토일 연달아 등산하려니 영 기운이 없었습니다.
"잠깐 앉아서 쉬자. 우리 시간 많아."
그런데, 갑자기 누런 개 한 마리가 달려왔습니다. 잘 생긴 수컷 개였습니다. 간식을 나눠주려 했으나, 입맛이 까다로웠습니다. 전혀 받아먹지 않았습니다. 정상에서 한 아주머니가 오징어를 개에게 주었으나, 누렁이는 그것도 역시 먹지 않았습니다.
"왜 안 먹지?"
우리 모두 의아했습니다. 아주머니는 누렁이에게 이것저것 주며 먹어보라고 했습니다.
"달걀흰자는 좋아하네."
누렁이는 빵도 거부하고, 유일하게 달걀흰자만 먹었습니다.
"고 녀석, 까다롭네."
아저씨가 말했습니다.
노부부들이 등산했던 투구봉으로 하산했습니다. 노부부들은 물줘와 내가 등산했던 곳으로 하산했습니다. 듣자 하니, 투구봉은 굉장히 힘들고 험하다고 했습니다.
"오, 그럼 저는 안 갈래요!"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한번 가보지 그래요. 경치가 다르잖아요."
"음, 알겠어요."
조언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과연 힘들었습니다. 가파른 경사와 바위가 즐비했고, 쉴 수 있는 평지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 통영 졸업식인데, 졸업 시험 난이도가 최상급이네."
한 발 한 발 조심히 디디며, 그 와중에도 재치를 잃지 않았습니다.
"아까 다른 분들은 여길 등산하신 거네요? 힘드셨겠어요. 차라리, 하산으로 선택하길 잘한 것 같아요."
물줘가 말했습니다. 다행히, 거리가 짧아서 하산은 금방 끝났습니다. 등산 약 세 시간, 하산 약 한 시간이 소요됐습니다. 이제 막 정오가 지났을 뿐이었습니다. 아직도 배가 오려면 세 시간 이상이나 남았습니다.
"여기 누워서 쉬다 가자. 일찍 내려가봤자, 갈 데도 없잖아."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바닥에 깔고, 드러누웠습니다. 피곤해서 한숨 잘까 싶었지만, 잠이 안 올 것 같았습니다. 파란 하늘과 앙상한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며 한낮의 여유를 즐겼습니다.
"심심한데, 끝말잇기 할래?"
물줘는 물타기라는 단어를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데?"
검색하니, 실제로 있는 단어였습니다.
"이런 단어가 있어? 처음 알았네! 너 의미도 모르고 막 던진 거지? 이산화나트륨."
결과적으로 두 번 모두 승리했고, 별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배 못 타면, 어떡해요?"
물줘가 물었습니다.
"안돼, 배 탈 거야. 네가 어제 나한테 한 짓 생각하면, 이 섬에 더 머물면 안 될 것 같아."
"왜요?"
"네가 나 덮칠까 봐."
"추워서 그런 거였어요."
"허리는 왜 안아? 그럼 안돼."
"남자의 본능인데...... 안마해 드릴까요?"
"응."
수작 부리는 게 뻔했지만, 군말 없이 엎드렸습니다. 원래 안마받는 걸 좋아하는 편입니다. 물줘가 손으로 여기저기 꾹꾹 눌렀으나, 하나도 안 시원했습니다.
"손도 안마할까요?"
"끼 부리네."
"계속 끼 부릴 거예요."
다시 돌아 누웠습니다. 물줘는 손을 만지작거리나 싶더니, 이내 관뒀습니다. 그냥, 손이 잡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물줘는 내내 불안해했습니다. 통영항으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도, 과태료 문자를 보며 안절부절못했습니다. 문자가 무려 네 통이나 왔다고 했습니다.
"좀 보태줄까?"
안쓰러워서 물었습니다.
"아니에요."
물줘가 거절했습니다.
"밥 살게. 복국 어때?"
마침 가려고 점찍은 복국 맛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호 시장의 대부분의 식당들은 점심 장사만 하고 폐점하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가까운 복국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참복국은 16,000원, 졸복국은 14,000원이었습니다.
"무슨 차이예요?"
주인아주머니에게 질문했습니다.
"참복국은 국물이 맛있고, 졸복국은 생선이 맛있어요. 식초를 넣으면, 국물이 더 시원해요."
참복과 졸복은 생김새가 달랐습니다. 맛은 무슨 차이인지 가늠하기 어려웠습니다.
"끝말잇기 두 번이나 이겼으니까, 진 사람이 후식 사."
물줘는 카페 슈메르로 안내했습니다. 카페 사장에게 상호 뜻을 물으니, 슈크림의 슈와 불어의 메르(바다)라는 의미로 지었다고 했습니다. 슈크림처럼 달콤한 바다라는 뜻이었습니다. 때마침 일몰 시간이었습니다. 물줘를 처음 만나기 전, 그가 내게 야경 보자고 제안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