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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히 Jun 15. 2023

[블야 섬&산 77좌] 고흥 애도(83m)


[떠나기 전날의 통화]


B: 누나, 나한테 왜 그래?

슈히: 글쎄, 왜 그럴까?

B: 상처받았어?

슈히: 이용당하고 버려진 느낌이랄까?

B: 왜 내가 이용했다고 생각해?

슈히: 너 내 등산 동행이라며.

B: 아파서 등산 못 가잖아요.

슈히: 무릎이 아파서?

B: 염증 주사 세 번 맞고, 물 세 번 뺐다니까.

슈히: 음, 그래?

B: 나도 등산 좋아하는데, 답답하고 우울하지. 

슈히: 음.

B: 지금 공부하고 있잖아. 누나는 거리도 멀고, 현실적으로 결혼이 불가능하잖아. 서로 성격도 다르고. 누나를 놓아준 거지. 버린 게 아니라.

슈히: 놓아줬다고? 네가? 버린 거지, 무슨 소리야!

B: 버린 건 아니지. 누나가 내 물건도 아니고, 소유한 적이 없는데.

슈히: 난 이렇게 소개팅해서 네가 잘 될 줄 몰랐는데.

B: 질투 나서 그래?

슈히: 당연하지.

B: 응원한다면서.

슈히: 생각해 보니까, 응원은 못 해줄 것 같다?

B: 나한테 재를 뿌리면 어떡해. 내가 상처 줘서 미안해.

슈히: 방해하고 싶은데?

B: (웃음) 왜 방해하고 싶어?

슈히: 널 못 보잖아. 오 월에도 못 보고, 유 월에도 못 보잖아!

B: 날 봐서 뭐 하게? 내가 왜 보고 싶어?

슈히: 내가 너 좋아하니까?

B: 나 좋아해?

슈히: 응.

B: 좋아하면, 연인으로서 좋아해?

슈히: 네가 부담스러워하니까......

B: 부담 느끼지, 이러니까.

슈히: 난 네가 아니라서, 몰라. 네 주장은 알겠어. 거리도 멀고, 나이도 내가 훨씬 많고, 가치관도 안 맞아서 나랑 사귀기는 어렵다. 근데, 내 입장은 달라. 거리 멀어도, 내가 가면 되는 거고, 나이? 내가 결혼하자고 한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성격? 다르니까, 매력적인 거지!

B: 그럼 내가 평생 혼자 살아야 해?

슈히: 글쎄.

B: 날 노예처럼 부리고 싶어? 이용하고 싶고?

슈히: 무슨 소리야.

B: 누나 말을 여왕처럼 따랐으면 좋겠어?

슈히: 그런 관계 아니잖아.

B: 그래. 서로 응원하면 되잖아. 누나가 만약 괜찮은 남자 만났는데, 내가 누나한테 계속 연락하고, 질척거리고, 방해하면 좋겠어?

슈히: 한 달에 한 번은 좀 보자.

B: 어떻게 봐. 등산도 안 갈 건데. 난 이제 여자 친구 있잖아, 이제. 이렇게 연락하는 거 여자 친구가 알면, 안 좋아하지. 

슈히: 그거야, 네 여자 친구 사정이고. 내 알 바 아니잖아. 그것도 내가 헤아려야 해?

B: 누나 성격이 별로다. 착한 성격이 아니구나.

슈히: 그럼, 넌 착하니?

B: 누나가 강압적으로 날 대하잖아. 이런 상태에서 만나면, 내가 어떤 생각 들겠어?

슈히: 억지로 만나는 거지.

B: 그래. 별로야. 산 잘 타고, 건강 관리 잘하고. 좋은 인연 있으면, 만나고. 난 그런 걸 바라는 거야. 이따 칵테일 모임 간다며?

슈히: 응.

B: 칵테일 맛있게 먹고, 사람들이랑 재밌게 놀아. 난 지금 근무 중이고.

슈히: 근무 중에 시간을 내서, 나한테 전화했구나?

B: 나 그냥 내버려 둬.

슈히: ......

B: 응?

슈히: 어떻게 할지, 생각 중이야.

B: 내가 상처받잖아. 내가 사람을 어떻게 믿고 만나? 누나 이용한 거 아니야.

슈히: 그건 네가 애인이 없을 때 얘기고.

B: 애인은 있다가도 없겠지. 난 연애 다섯 번도 안 해봤어.

슈히: 많이 했네!

B: 괜찮은 남자, 많을 거야.

슈히: 아무튼, 결론은.

B: 응.

슈히: 빨리, 헤어져.

B: (어이없는 웃음) 아, 뭘 헤어져. 내가 좋아해서 만난 거야. 응원해 줘. 누나도 다른 사람 만나고, 연애해야 날 볼 수 있지, 지금 이렇게 해서 날 어떻게 만나?

슈히: 앞으로도 너 보기 어려울 것 같은데? 너 연애하잖아.

B: 연애할 땐 만나긴 힘들지.

슈히: 빨리 헤어져.

B: (어이없는 웃음) 왜 저주를 품어?

슈히: (웃음) 빨리 헤어져야 만나지. 너 한 달에 한 번도 안 된다며?

B: 애인이 있는데, 누나를 단둘이 만나겠어?

슈히: 그럼, 여럿이서 만나면 되잖아.

B: 시간을 맞추기 힘들어. 나 공부하고 있잖아.

슈히: 그러면서 애인 만날 시간은 있고? 나한텐 하루도 내기 어렵고?

B: 괴로워, 괴로워. 누나 보면 스트레스받을 거 같아.

슈히: 난 네 생일 챙겨주고 싶어서, 만나자고 한 건데.

B: 내가 여자 친구 사귀는 게, 질투나?

슈히: 당연하지. 제정신이야?

B: 누나는 날 좋아하는 게 아니라, 현실 도피야. 

슈히: 야! 네가 뭔데 나에 대해서 그렇게 쉽게 말하냐?

B: 누나도 날 좋아하는 건 아닌 거 같아. 날 좋아하는데, 나한테 저주를 품어?

슈히: 억울한 거야.

B: 누나한테 설명 잘했잖아.

슈히: 아무튼, 내버려 두라 이거지?

B: 어.

슈히: 그렇게 좋아, 여자 친구?

B: 어, 좋아.

슈히: 어떤 점이?

B: 헬스를 좋아해서 취미도 비슷하고, 착하고, 부지런해. 일하면서, 퇴근한 후에 운동하고, 자격증 따는 모습이 좋고. 성실한 모습, 부지런한 모습이 좋아.

슈히: 야! 그럼 난 게으르고, 안 성실해?

B: 아니. 그것보단, 나랑 결이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날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슈히: 난 널 이해할 수 없고?

B: 내가 누나를 이해할 수 없지.

슈히: 아......

B: 그 사건 이후로 누나한테 확 마음이 식었지. 어떻게 보면, 내 뒤에서 일어난 일이잖아. 그리고, 결론적으로 허위 사실이었고. 난 성실하고, 자기 관리 잘하고, 정신 건강한 사람이 좋아. 난 헤어지면, 다른 사람한테 잘 지내라고 할 것 같아. 우리 사귄 거 아니잖아. 서로 이성적인 매력이 있고, 느낌과 분위기가 있었으니까 그렇게 된 거고. 그냥 쭉 이어진 거지.

슈히: 아무튼, 넌 지금 여자 친구가 생겨서 행복하겠다?

B: 행복해야지. 나 타지에서 십 년 살다가 이제 막 왔단 말이야. 친구도 없고. 잘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잘 됐으면 좋겠어. 좋아해, 내가.

슈히: 한 번 만나고 사귀자고 했어?

B: 아니.

슈히: 그럼?

B: 세 번 만났어.

슈히: 일주일 사이에 많이도 만났네.

B: 쉬는 날이 많아서, 봤는데. 괜찮더라고.

슈히: 음. 네가 좋아하는 쪽이네.

B: 내가 좋아하는 쪽이야.

슈히: 오, 잘 되겠네.

B: 잘 됐으면 좋겠어.

슈히: 어.

B: 누나 좋다고 다가오는 남자들 많잖아. 기운내고, 다른 사람 좋은 사람 있을 거야. 괜찮은 사람.

슈히: 내 마음에 안 드는데, 어떡해.

B: 마음에 드는 사람 무조건 있어. 누나는 보니까, 주변에 남자 만날 수 있는 조건이 엄청나게 좋더구먼. 난 남초 직장이잖아. 친구도 없고. 동호회 다니면서 알던 사람이 전부였는데, 나왔잖아.

슈히: 다시 돌아와, 그럼!

B: 이미 기분 다 상하고, 사람 만나는 거 질렸어. 호의를 베풀었는데, 오해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뒤에서 무슨 말할지도 모르고. 혼자 사는 게 편한 것 같기도 하고(김 빠지는 웃음).

슈히: 내가 원하는 건, 하나야. 앞으로도 널 볼 수 있는 거.

B: 나? 여자 친구 있는데, 어떻게 봐. 둘이서. 헤어지면 모를까.

슈히: 아, 그래?

B: 그렇잖아. 누나는 반대로 하라면, 할 수 있어?

슈히: 내가 만약 남자 친구가 있는데, 네가 한 달에 한 번만 만나자고 하면, 만날 수 있냐고? 

B: 애인한테 안 미안해?

슈히: 내 인간관계잖아.

B: 단 둘이 보는 건 좀 그래. 난 남사친, 여사친 없다고 생각해. 술 마시고 사고 칠 수도 있는 거고. 애인이 싫어해, 무조건.

슈히: 내가 볼 땐, 너 이번 여자랑 결혼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네가 좋다고 하니까.

B: 나 비혼주의자야.

슈히: 그래?

B: 딩크롤 원해. 여자 친구도 마찬가지고. 

슈히: 네가 사귀자고 했더니, 여자가 바로 수락했어?

B: 응.

슈히: 오, 쉽네?

B: 나보고 다시 고백하래.

슈히: 제대로? 세상에!

B: 사귀는 사이는 맞는데, 다시 고백하래.

슈히: 다시 고백할 거니?

B: 그러니까, 누나랑 정리하는 거지. 엄밀히 말하면, 아직 사귀는 사이는 아닌데,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하거든. 내 마음은.

슈히: 고백 언제 할 거야?

B: 이번 주나, 다음 주에 해야지.

슈히: 나 내일 고흥 가는데.

B: 고흥 어디?

슈히: 애도.

B: 그런 데가 있나?

슈히: 내가 몇 주 전에 말했잖아. 너 보러 갈 수 있으면, 보러 가겠다고.

B: 난 임자 있는 몸이니까.

슈히: 사귀는 거 아니라며?

B: 고백만 다시 하랬지, 거의 사귀는 사이야. 내가 스스로 책임감을 갖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예의를 갖추겠다는 거야. 누나를 어떻게 만나?

슈히: 그래, 네 상황은 이해해.

B: 날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마.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정신 건강하게, 해맑게 살고 싶어. 누나가 원하는 건, 우리 둘 다 악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거야. 결국에는 더 외롭고, 공허하고, 마음대로 안 될 텐데. 이런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거나, 싸우기라도 해 봐.

슈히: 이상하다. 난 너랑 만나면서 공허한 적이 없는데, 왜 그렇게 생각할까?

B: 영원히 만날 순 없잖아. 끝은 그렇잖아.

슈히: 너 어차피 비혼주의자고, 딩크 원한다며? 왜 아이를 원치 않을까?

B: 그만큼 잘할 자신이 없으니까. 아이가 있으면, 나 스스로를 보호하고 절제해야 하고. 위기가 닥쳐도, 내 힘을 제대로 발휘 못 해. 약점이 잡히잖아.

슈히: 네 예비 여자 친구, 예뻐?

B: 응, 괜찮아. 외모보다 성격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 예뻐, 예쁘게 생겼어.

슈히: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B: 그러니까, 날 놓아줘. 알겠지?

슈히: 내가 너 붙잡고 있는 거니?

B: 날 협박하는 식으로 말했잖아.

슈히: 어, 협박한 거 맞아.

B: 협박하지 마. 안 통해.

슈히: 네가 이렇게 전화하니까, 재밌다? 내가 어제 너한테 전화했거든. 안 받던데?

B: 누나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잖아. 보통 아닌 거 같아, 성격이. 나 응원해 줘. 불쌍한 놈이야.

슈히: 왜 불쌍해?

B: 이십 대 때 훈련만 받았어. 얼마나 힘든데.

슈히: 맞아...... 무릎은 왜 다쳤어?

B: 양쪽 팔꿈치 테니스 엘보우 파열되고, 지금은 완치했는데. 오른쪽 무릎은 장경인대염으로 부상당해서 목발 짚고 다니고.

슈히: 아이고......

B: 원래 안 좋았어. 너무 많이 뛰고, 사십 킬로 그램 무장 메고, 산악 구보도 하고 이러니까. 다리가 많이 나갔어.

슈히: 응...... 아무튼, 보고 싶어.

B: 지나간 인연으로 생각해.

슈히: 다시 볼 날이 오면, 좋겠다. 근데, 그건 네가 헤어지기 전까진 불가능할 거 아냐.

B: 어차피, 그냥 잊는 게 최고야. 안될 인연이면, 잊고 지내. 힘들고, 짜증 났던 기억은 금방 없어져. 사람이 죽고, 사별해도, 몇 달 지나면 괜찮아진대. 누나, 인생 열심히 살잖아.

슈히: 영화 <오토라는 남자> 얘기했었잖아. 그건 사별한 부인 따라 죽으려고 자살 시도하는 남자 이야기야.

B: 음.

슈히: 아무튼, 네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 만났고, 잘해본다고 하니, 응원하는 게 맞겠지.

B: 그래,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마워. 순간 짜증 나고, 열받을 수도 있지. 항상 원하는 대로 잘 됐으면 좋겠지만, 우리 둘 다 상처받을 거야. 안 좋아.

슈히: 네가 나 두 번째로 만났을 때, 집 평수, 고정 수입 물어서 '조건을 많이 보는구나' 하고 생각했어.

B: 조건 안 봐. 나 빚만 일억 육천이야.

슈히: 나한테 조건을 물었잖아. 왜 빚이 늘었어?

B: 난 국내 여행도 혼자 이틀 이상 가본 적이 없거든. 난 엄청 아껴서, 빚 갚는데.

슈히: 난 빚이 없잖아. 빚이 없으니까, 자유롭게 쓰는 거지.

B: 그래서 물어봤던 거야.

슈히: 열심히 일해서, 벌어서 쓰고 있어. 하지만, 자신 있게 집 평수, 고정 수입 말할 순 없어.

B: 물어본 건 실례이긴 하지. 사람들이 하고 싶은 대로 못 하고 살잖아.

슈히: 어, 맞아.

B: 해외여행도 못 가는 사람 얼마나 많은데.

슈히: 난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거든. 물론, 해외 나가려면 돈 많이 벌어야 해.

B: 그렇지.

슈히: 너 왜 빚이 늘었니? 일억 오천이었는데, 왜 일억 육천으로 늘었어?

B: 일억 오육 천이야.

슈히: 너의 봄날을 난 응원해 주는 게 맞는 거겠지.

B: 고마워. 다신 그런 생각하지 마. 내가 어떻게 사람을 믿고, 만나겠어. 누나가 그런 생각하면.

슈히: 난 뺏긴 느낌이야! 그 여자한테.

B: 아냐. 누나가 아직 나 가진 적 없어. 누나는 충분히 매력 있고, 괜찮은 사람이야. 그런데, 가치관이 안 맞는 거지. 난 그렇게 놀러 다니는 유형이 아니야. 고독하게 고통을 즐기는 편이라서, 누나랑 안 맞는 거뿐이야.

슈히: 같이 놀러 다니는 건 안 되는 거야? 

B: 안 되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슈히: 헐......

B: 내가 기분이 좋지 않은데. 상대방은 어떻겠어?

슈히: 그저, 헤어지길 바라야겠네.

B: 그런 말도 하지 마.

슈히: (웃음)

B: 누나, 괜찮은 사람 만날 수 있어.

슈히: 있지, 점쟁이 말은 아직 유효해. 팔 월 지나기 전에 여자 안 만나는 게 좋다고 했잖아. 아직 팔 월 안 지났다? 네 예비 여자 친구도, 아직 모르는 거지.

B: 싸워 보지도 않았으니, 잘 모르지. 그런데, 난 결혼 빨리 해야겠다, 이런 생각은 없어.

슈히: 야, 너 서른다섯 살까지 미혼이면 나랑 놀기로 한 거, 유효한 거지? 금방이다.

B: 그런데, 서른다섯 살까지 여자 친구랑 사귀고 있으면, 안 되는 거지. 그냥, 잊고 다른 사람 만나고 있어. 마음 가는 대로 만나.

슈히: 그땐 그때고. 어, 그래. 알겠어. 아무튼, 빨리 헤어지고 돌아와?

B: 그런 말 하지 마. 오래오래 사귈 거니까. 난 내 꿈이 먼저야. 결혼해도, 죽을 땐 혼자야. 끊을게. 근무 중이라서. 잘 살아.

슈히: 너도.



  다음날, 안내 산악회를 통해 단체로 고흥 애도에 갔습니다. 전세 버스 옆좌석에 앉은 오십 대 여성은 새침하고 말수가 적었습니다. 그녀가 호두과자와 쌀과자를 주길래, 고맙다고 인사한 후 받아먹었습니다. 

  "하루에 세 명한테만 이렇게 선물해요."

  "오, 사람들이 좋아하겠어요."

  "고흥 봉래산 갈 거예요?"

  "지난 삼 월에 이미 다녀왔어요. 안 가요."

  "그럼, 스틱 좀 빌려도 돼요?"

  "네, 쓰세요."

  길고 지루한 시간을 달려, 드디어 고흥에 도착했습니다. 선착장에서 배를 타려는데, 식당 간판을 보자 B가 떠올랐습니다. ○○식당이라고 써진 상호는 B가 사는 곳의 지명이었습니다.

  '휴, 자꾸 생각나게.'

  하늘은 회색 구름으로 가득했습니다. 비 예보는 없었으나, 비가 몇 방울 떨어졌습니다.

  주말이라서, 관광객이 꽤 붐볐습니다. 작은 배를 타고 오 분도 채 안 돼서 애도에 도착했습니다. 애도(艾島)는 쑥섬이라고도 불립니다. 도착하자마자, 카페에 들어가 배부터 채웠습니다. 준비한 도시락을 풀었습니다. 오십 대 남성 한 분이 고맙게도 따뜻한 쑥라테와 쑥전을 대접했습니다.

  오십 대 여성은 걸음이 빨랐습니다. 혼자 앞서더니, 곧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래서, 오십 대 남성과 동행하게 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의 직업은 연구원이었습니다.

  "주말에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데, 등산하긴 싫어서 여기 왔어요."

  "그러시군요. 저는 여기가 블랙야크 섬 인증지라서 왔어요."

  바다가 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사진 촬영했습니다. 주홍색 양귀비와 보랏빛 알리움이 한창이었습니다. 특히 알리움의 꽃말은 '멀어지는 마음', '무한한 슬픔'이라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의미였습니다.

  '어쩜, 지금 심정이랑 똑같니! 속상해......'


  블랙야크 섬&산 인증지가 어딘지 몰라 두리번거렸습니다. 주위를 둘러봐도 관광객들의 행색은 등산이 목적은 아닌 듯 보였고, 이정표도 없어서 헤맸습니다. 안내 산악회는 집결 시간이 있기 때문에, 시간 내에 목표를 달성해야만 하는 제한이 있습니다. 불안했습니다. 가까스로 애도 정상에 닿았을 땐, 기뻤습니다.  문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쑥섬 정상(해발 팔십삼 미터)

에베레스트(팔천팔백사십팔 미터)

백두산(이천칠백오십 미터)

한라산(천구백오십 미터)


별 차이가 없군요^^



육박 나무

저는 육박 나무이고요. 꽃말은 '강인함'입니다. 꽃은 여름에 빨간색으로 피며, 나무껍질이 육각으로 벗겨진다고 해서 육박 나무입니다. 매우 천천히 자라며, 남해안에서도 귀한 나무이고, 얼룩덜룩해서 해병대 나무라고도 불리며, 쑥섬에서는 프로펠러나무라고도 합니다. - 힐링파크 쑥섬쑥섬



  '어쩜 가는 곳마다 네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니...... 해병대라는 단어만 봐도 네 생각에 울컥하는구나. 선택받지 못한 서러움을 모르겠지. 현재 다른 사람과 행복할 테니까.'



쑥섬 남자 산포 바위 - 쑥섬 남자들이 풍류를 즐기고 안녕을 염원하던 바위

여기는 쑥섬 남자 산포 바위입니다. 쑥섬에서는 경치가 좋은 곳에서 놀거나 잠시 쉬는 것을 산포한다고 합니다. 다소 뾰족이 솟았습니다. 주로 남자들이 명절이나 보름날 달밤에 음식을 싸와서 노래와 춤을 즐기기도 하고, 가정과 미래에 대한 꿈과 안녕을 기원하던 곳입니다. 여러분도 편안한 마음으로 여기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잠시나마 기원하면, 바라는 것들이 잘 이루어질 겁니다. 이 바위 인근에서는 원추리와 참나리 등의 야생화가 유 월과 칠 월에 피고 집니다.

섬에는 다양한 형식의 남녀 짝짓기 놀이 문화가 있습니다. 쑥섬에서는 여자 산포 바위와 남자 산포 바위에서 놀다가 만나면 애틋한 마음을 전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썸을 타던 곳입니다.


  '풉! 장소를 나름 재밌게 구성했네.'



다정큼나무

저는 다정큼나무이고요. 꽃말은 '친밀'이며, 쑥섬에서는 오 월에 흰색 꽃이 핍니다. 주로 따뜻한 남해안에서 잘 자라요. 자연스럽게 부채꼴 모양이 나오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자연 미인인 셈이죠^^ - 힐링파크 쑥섬쑥섬



  '자연 미인 다정큼나무로구나!'


  안내 산악회 버스를 놓칠 세라, 서둘러 선착장으로 향했습니다. 안내 문자가 왔습니다.

    '봉래산 편백숲 가실 분들만 오후 한 시 삼십 분까지 여객선 터미널로 나오세요. 쑥섬에서 시간 보내실 분들은 오후 세 시 이십 분까지 나오시면 됩니다.'

  "봉래산 가실 거죠?"

  동행에게 물었습니다.

  "네."

  "다행이네요. 그럼, 쑥섬에서 좀 더 머물죠."

  "차 한 잔 더 할래요? 입술이 파랗네. 추워 보여요."

  오후가 되자, 먹구름이 걷히고 밝은 햇살이 비췄습니다. 오전 날씨와는 대조적이었습니다. 따뜻한 유자차를 홀짝이며 해변을 거닐었습니다. 평화롭고, 여유로웠습니다. 하늘이 개인 것처럼,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거라고 스스로 위안 삼았습니다. 애도의 애는 사랑도 쑥도 아닌, 깊은 슬픔(哀)이었습니다.


애도(쑥섬)

전남 일호 민간정원이자 국내에서 보기 힘든 해상정원으로 계절에 따라 삼백여 종의 꽃을 만날 수 있는 환상의 섬입니다.



새침데기 짝꿍이 준 간식(1)
새침데기 짝꿍이 준 간식(2)
알리움(꽃말: 멀어지는 마음, 무한한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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