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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히 Jul 14. 2023

[블야 백두 44좌] 남원 연하천 대피소(1,510m)

  남원의 사치재, 고남산, 수정봉 등산을 마친 후, 산악회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습니다. 인근에서 하루 묵고, 다음날 홀로 지리산에 갈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땅한 곳이 없어서 조금 먼 거리에 위치한 게스트 하우스를 예약했습니다. 그나마 잘 곳이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등산하다 보면, 워낙 외딴곳이 많아 비용이나 위치가 합리적인 숙소를 정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했습니다. 주차장은 특별히 없어서, 인근 식당 앞 공터에 주차했습니다. 낯선 한자가 보이길래, 검색해 보니 도마에서 베고, 솥에 삶는다는 뜻이었습니다. 특히 솥 정(鼎)이 복잡했습니다. 맛집인 것 같아서 식사하고 싶었으나, 이미 식사를 마친 후여서 가보진 못했습니다. 다음날에도 역시, 새벽 일찍 출발해야 하는 일정이었습니다.

  숙소에 입실했습니다.

  "계세요? 아무도 없나요? 여보세요?"

한참 두리번거리며 소리쳤으나, 인기척이 없었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던 관리자를 겨우 찾아냈습니다.

  마당은 길냥이들의 보금자리였습니다. 귀여운 아깽이들이 꼬물거리는 모습이 마냥 사랑스러웠습니다. 죄다 누렁이들이었습니다.

  "중성화 수술은 안 시켜요?"

관리자에서 묻자,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구례군 예산이 부족해서, 중성화 수술 못 한대요."

  "저런, 그럼 계속 개체 수가 늘어나겠네요. 길냥이들은 수명이 짧은데. 그만 낳지......"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음정 마을로 주행했습니다. 연하천 삼거리를 지나 연하천 대피소까지만 갈 예정이었습니다. 지리산 국립공원에 전화해 문의하니, 편도 약 칠 킬로미터, 약 네 시간 소요될 거라고 했습니다. 왕복이면 약 십사 킬로미터, 약 여덟 시간 거리이니, 선뜻 가겠다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도전하게 됐습니다. 걱정스러웠지만, 별 수 없었습니다. 동행이 구해질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순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신기한 식물들을 잔뜩 만났습니다. 청포도처럼 생긴 개옻나무, 잎이 녹색에서 백색으로 변하는 개다래나무 등이었습니다. 옻나무보다 맛이 없대서 개옻나무라고 불리고, 개다래나무의 잎색이 변하는 이유는 곤충을 유인해 번식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꽃가루받이가 끝나면, 잎은 본래대로 녹색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알면 알수록, 놀라운 식물의 세계입니다.

  초반에는 평지가 쭉 이어졌고, 그늘이라서 부담 없이 천천히 걸었습니다. 부부 한 쌍과 마주쳤는데, 대피소에서 하루 묵고 귀갓길이라고 했습니다.

  "대피소에서 자는 거, 상당히 불편해요. 제대로 못 씻고, 끼니도 대충 때워야 하고. 게다가, 운이 나쁘면 심하게 코 고는 사람과 합숙할 수도 있거든요."

오십대로 보이는 여성이 귀띔했습니다.

  "아, 그렇겠네요. 저는 어제 게스트 하우스에서 혼자 잤어요. 그 편이 훨씬 낫죠."


  완만한 평지길이 끝나고, 이제 돌계단 등산 시작이었습니다. 간식을 꺼내 먹기 위해 잠시 짐을 내렸습니다. 등산객 두 명이 지나가며 말을 건넸습니다.

  "혼자 오셨어요?"

  "네."

  "어디까지 가세요?"

  "연하천 대피소요."

  "여기로 가시게요? 힘드실 텐데!"

  "괜찮아요. 국내 명산 100 완등했고, 현재 백두대간 약 사십 좌요. 혼자서도 충분해요."

  "오, 그러시구나. 안전 산행하세요!"

등산은 어차피 모두가 힘들고 인내심이 필요한 과정인데, 남에게 응원은커녕 지레 겁을 주는 태도가 영 못마땅했습니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 배낭을 멨습니다. 돌계단을 천천히 올랐습니다. 또래로 짐작되는 여자 한 명이 하산 중이었습니다.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음정 마을까지 한참 남았나요?"

  "돌계단 끝나면 쭉 평지라서, 갈 만해요. 거리는 꽤 길어요. 대구에서 오셨나 봐요?"

그녀의 가방에 달린 띠지를 보고 거주지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종주하려고 왔는데, 몸 상태가 나빠서 혼자 하산해요."

  "아이고, 그러시구나. 조심히 내려가세요!"


  연하천 대피소까지 약 칠백 미터 남았을 무렵, 하산하는 여자 두 명과 마주쳤습니다. 그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저기, 혹시 생리대 갖고 계세요?"

  "네? 아뇨, 없어요." 

잠시, 당황했습니다.

  '생리대를 안 갖고 다니는구나. 좀 갖고 다니지! 물론 나도 지금 가진 게 없긴 하지만...... 어차피, 난 면 생리대 써서 남한테 주기엔 좀 껄끄럽기도 하고.'


  해발 천 미터가 넘으니, 선선했습니다. 자꾸 허기가 져서 자주 쉬며 음식을 섭취했습니다. 그렇게,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연하천 대피소에는 도마처럼 생긴 나무판에 이런 글귀가 적혀있었습니다.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무슨 의미일까? 인간 출입 금지인가? 연하천 대피소인데 연하는 대체 어딨어? 죄다 어르신들 뿐!'

에스엔에스에 사진과 글을 올리자, 황당해하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맥락이 그렇게 이어진다고요? 지금도 연하천 대피소인가요?"

  "아니오. 그냥, 웃으세용."


  삼각고지 쉼터에서 잠깐 숨을 고르는데, 오십 대 남자 한 명이 가벼운 걸음으로 하산했습니다.

  "어? 벌써 다녀오셨어요?"

몇 분 전에 마주친 적이 있는 등산객인데, 상당히 빨랐습니다. 대화하며 하산하니, 지루했던 산길이 유쾌해졌습니다. 

  "저는 한참 내려가야 차가 있어요. 음정 마을에서부터 등산했거든요. 여기까지 차를 끌고 올 수 있구나. 몰랐네요! 고생했지만, 덕분에 신기한 식물들을 발견했어요. 다래나무 꽃은 수제비 같이 생겼던데."

동행은 고맙게도 음정 마을까지 차를 태워줬습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편하게 빨리 도착했네요!"

혼자 산에 가도 결과적으로 내내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개옻나무
다래나무꽃
개다래나무
야광나무(1)
야광나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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