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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히 Jul 18. 2023

[백두대간 45좌] 거창 동엽령 구급함(1,260m)

  다랑과 처음 만날 날, 장장 열두 시간 이상을 함께 보냈습니다. 전주의 수목원과 동물원을 관광하고, 식사도 점심과 저녁 두 끼나 함께 먹고, 카페에서 대화하고, 코인 노래방에서 노래까지 불렀습니다. 

  "여자 가수 누구 좋아해요?"

  "윤하요."

<별에서 온 그대>를 열창했습니다. 노래방에서 그는 내 노래를 듣고 반한 모양이었습니다. 상당히 놀랐다고 했습니다. 한참 후에야 들은 이야기였습니다.

  "옆에서 눈을 빛내며 노래 들었는데, 못 봤어?"

  "...... 못 봤는데." 

  "윤하보다 누나가 노래 더 잘하는데!"

  "윤하 좋아하는 S 님한테 그 말하면, 비웃으실걸?"

  "노래 특별히 배웠어?"

  "아, 초중고 모두 합창부였어."

  그날 이후, 그는 꼬박꼬박 연락했습니다. 꽤 다정한 성격이었습니다. 아침에 잘 잤냐는 인사와 함께 끼니 때면 어김없이 식사 여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잘 자라는 끝맺음이 있었습니다.

  '나한테 호감이 있는 모양이로군.'

  작업한 글을 보여주니,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평생 구독할게요."

모임에서 강퇴된 경험을 전하니, 그는 위로의 말을 했습니다.

  "어떻게 작가님 같은 분을 싫어할 수 있죠? "

말을 참 예쁘게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누나가 운영하는 모임에 들어갈까요?"

그러라고 했고, 다랑은 곧장 단체 대화방에 들어왔습니다. 원래 그가 부르는 호칭은 '작가님'이었는데, 곧 '누나'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두 살 터울의 또래입니다.

  "누나, 말 편히 해요."

  "그래, 너도 반말해."

  다랑이 처음으로 참석한 산행은 남원의 수정봉이었습니다. 남자 둘, 여자 둘 총 네 명이 함께 등산했는데, 다랑이 제일 꼴찌였습니다. 그의 체중은 약 백삼십 킬로그램이었습니다. 최근에 어깨를 다치고, 수술하면서 살이 걷잡을 수 없이 찐 모양이었습니다. 

  '마치 미쉐린 타이어 캐릭터 같군! 가슴이며 배에 붙은 지방 탓에 옷이 미어터질 것 같네.'

그는 상당히 힘겨워하며 천천히,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멘토의 자격으로, 그를 훈련시키기 위해 계획을 짰습니다. 남원 수정봉도 상당히 쉬운 곳인데, 멘티가 힘겨워했으므로 이번에는 난이도가 더 낮은 곳을 준비습니다. 눈높이를 맞춘 곳은 바로 거창 동엽령 구급함이었습니다. 

  새벽 다섯 시, 다랑과 만났습니다. 그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습니다. 미처 준비를 마치지 못했는데, 그가 오래 기다릴까 봐 다급했습니다. 서두르느라, 현관에 그만 휴대전화와 신용카드를 놓고 와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달은 건 안성 탐방 안내소에 도착했을 무렵이었습니다.

  "다시 집으로 가?"

다랑이 물었습니다.

  "아냐, 어쩔 수 없지. 이따 네 휴대전화 좀 빌릴게. 블랙야크 알파인 클럽 앱 아이디, 비밀 번호만 알면 되거든. 다른 사람 휴대전화로도 인증할 수 있어."

  주차장엔 주차된 차들이 여러 대 보였습니다. 다랑이 짐을 모두 들어줘서 참 편했습니다. 그는 마치 어린 딸을 돌보는 아빠 같았습니다. 운전기사 겸 짐꾼의 역할을 능숙히 그리고 묵묵히 수행하는 그는 여러모로 쓸모 있는 존재였습니다.

  쾌청한 날씨였습니다. 등산로 초반부터 졸졸 계곡 물소리가 들렸습니다. 울창한 숲이 쭉 이어졌습니다. 무더웠지만, 그늘이라서 더위를 충분히 피할 수 있었습니다. 계단의 경사는 완만했습니다. 난이도를 확 낮춘 덕분에 등산이 수월했습니다. 지난번 남원 수정봉 때 고전했던 멘티는 온데간데없었습니다. 한 시간 반 남짓 걸렸을까,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종주하는 등산객들이 띄엄띄엄 대여섯 명 지나갔습니다.

  다랑의 휴대전화로 블랙야크 알파인 클럽 앱 접속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왜 안 되지? 비밀 번호 이게 맞는데...... 이렇게 되면, 그냥 긴급 인증 요청해야겠다."

나중에 알고 보니, 비밀 번호 마지막 자리 하나가 틀렸습니다. 안타까웠습니다.

  "아, 그게 특수 문자가 아니라 숫자였구나! 왜 몰랐지?"

  하산하는 내내 발을 담글 만한 계곡이 있을까 살폈습니다. 주차장까지 얼마 안 남은 지점에서 적당한 곳을 발견하고, 잠시 머물렀습니다. 등산화와 양말을 훌훌 벗고 계곡에 발을 담갔습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자연이 발의 열기를 앗아갔습니다. 간담이 서늘할 정도였습니다. 

  "여름엔 역시 산이지! 계곡 물놀이하러 산에 와야지. 발을 담갔으면, 무릎까지 적셔. 그래야 무릎도 튼튼해지거든."

  그런데, 멘티는 이동하다가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말았습니다. 미끄러져서 물에 퐁당! 빠지고 말았습니다.

  "으악! 괜찮아? 왜 거길 디뎠어? 바위는 미끄럽잖아."

그의 휴대전화도 함께 침수돼서, 이후 찍은 음식 사진들은 모두 뿌옜습니다.

  주차장으로 돌아와, 여벌옷으로 갈아입고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돈가스 맛집을 가려고 식당에 확인 전화를 했으나, 재료가 이미 소진됐다고 했습니다.

  "아깝네. 그럼, 다른 식당 가자."

  중식당에서 해물 갈비 짬뽕과 탕수육을 먹었습니다. 주말이라서, 대기 시간이 꽤 길었습니다. 주차장이 협소하고, 방문객들은 미어터졌습니다. 번호표를 들고 그냥 무작정 기다리는 체계였습니다. 

  "날씨 더우니까, 누나는 차에서 에어컨 틀면서 쉬고 있어. 내 휴대전화 여기 두고 갈 테니까, 이따 전화받아. 식당 전화로 전화 걸게."

다랑의 극진한 배려 덕분에 지루한 시간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삼십 분 이상 기다린 끝에,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됐습니다. 따끈한 탕수육이 맛있었습니다. 운전하느라 고생한 멘티를 위해 점심을 사려고 했으나, 지갑을 집에 두고 온 통에 그럴 수 없었습니다. 휴게소에 들러 간식을 먹었는데, 이 또한 멘티가 샀습니다. 배부르고, 복에 겨운 오후였습니다. 


앵두(1)
앵두(2)


해물 갈비 짬뽕
탕수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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