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슈히 Jul 21. 2023

[함양] 영취산(1,075m)+백운산(1,278m)

  삼 년간 모은 적금이 드디어 만기 됐습니다. 감격스러웠습니다. 오 년간 생활했던 비좁은 원룸을 부리나케 탈출했습니다. 곧장 투룸을 계약했습니다. 앞으로 이 년 이상 머무를 공간이었습니다. 안락한 보금자리를 만들기 위해 살림살이를 장만했습니다. 냉장고, 세탁기, 침대, 라텍스 매트리스, 책걸상, 책꽂이, 컴퓨터, 복합기, 장롱, 반신욕조, 서랍...... 옮겨야 할 가구들은 끝이 없었습니다.


  사실, 정든 자취방을 떠난 특별한 까닭이 있었습니다. 바로 주인아주머니의 구박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처음에는 친절히 대해 주었으나, 최근 들어 까칠하게 굴었습니다. 제공된 인덕션 레인지가 고장 났을 때, 그녀는 무료로 제품을 교체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부터가 문제였습니다.

  "옥상의 빨랫줄 두 개 중 하나가 끊어졌던데, 수리 부탁드려요."

그러자, 주인아주머니는 거절했습니다.

  "그거 예전에 살던 세입자가 설치한 거예요. 필요한 사람이 직접 수리하도록 하세요."

  "빨랫줄이 얼마나 한다고요? 수리 좀 해주시죠! 저 다달이 월세 잘 내잖아요. 여기 오 년 이상 살았고, 지금 육 년 차잖아요. 겨우 그 정도도 안 해주시나요?"

  불만을 표현하자, 결국 그녀는 요청을 수락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복도에 내놓은 분리수거 물품들이었습니다.

  "복도에 아무것도 내놓지 마세요. 지저분해 보여요. 그리고, 다른 세입자들이 따라 할 수도 있어요."

  "출근할 때 처리하려고 잠시 놔둔 건데, 곧 분리수거할 거예요. 복도에 우산, 운동화 내놓은 세입자들도 있던데 그건 왜 안 치우죠? 산만해 보이던데요. 택배도 잔뜩 쌓여 있고요."

  "그냥 '네, 알았어요.' 하고 대답하면 되는 일 아닌가요?"

  "이건 갑의 횡포죠! 외출할 때 가지고 나갈 건데, 복도에 잠깐 내놓은 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요?"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전자레인지가 갑자기 고장 났습니다. 아예 작동되지 않았습니다.

  "수명이 다 됐나 봐요. 수리 부탁드려요."

주인아주머니에게 부탁했습니다.

  "본인 사비로 수리하면 돼요."

  "대한법률구조공단에 문의하니, 세입자가 요청하면 집주인이 수리해 줄 의무가 있다고 하던데요. 민법 제 육백이십삼 조요. '임대인은 목적물을 임차인에게 인도하고, 계약 존속 중 그 사용, 수익에 필요한 상태를 유지하게 할 의무를 부담한다.'"

  "구 월까지는 계약 유지하고, 시 월부터는 관리비 삼만 원씩 내세요."

  "아뇨, 그렇게는 못 하겠네요. 이런 구박받으며 살고 싶지 않아서요. 곧 이사 갈게요."


  다랑과 둘이서 이삿짐을 옮겼습니다. 업체를 불러 인부를 고용했다면, 아마 비용이 꽤 들었을 겁니다. 다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본인의 일처럼 도왔습니다. 그리고, 수고비도 일절 받지 않았습니다. 가족보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보다 더 고마운 이였습니다.

  "날씨가 많이 덥네. 고생 많았어! 도와줘서, 고마워."

다랑에게 인사했습니다.

  "난, 누나랑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걸."

그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너, 나 좋아해?"

  "누나 생일에 이미 고백했는데......"

  "뭐? 그게 고백이라고? 난 몰랐는데?"

  다랑은 이사뿐만 아니라, 집 청소도 거들었습니다. 생수, 모기장, 욕실 의자 등 당장 필요한 생필품들도 직접 사 왔습니다. 큰 도움이 됐습니다. 현관에 모기장을 설치하고, 그림을 벽에 거는 그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쓸모 있네.'


  칠 월 첫날, 다랑과 만나 여덟 시부터 원룸을 청소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아주머니가 또 억지를 부렸기 때문입니다.

  "보증금에서 청소비 빼고, 돌려 줄게요."

  "법적으로 청소비라는 건 없어요. 계약서대로 하시죠. 입주할 때 서명한 계약서에는 청소비라는 항목이 없어요. 오 년 전에 낸 보증금 그대로 주세요."

  "다른 세입자들은 군말 없이 청소비 다 내요. 슈히 씨가 직접 청소하면, 청소비 안 뺄게요."

  "알겠어요. 직접 청소할 테니, 보증금 제대로 주세요."

  새로 이사 간 투룸 청소하기도 벅찬데, 남의 집 청소까지 하려니 울화가 치밀었습니다.

  "딱 두 시간만 집중해서, 청소 마치자!"  

찌든 때를 벗기느라 전쟁을 치렀습니다. 날씨가 무더웠습니다. 뻘뻘 땀을 흘리는데, 다랑이 다가와 목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줬습니다. 그의 배려가 고마웠고, 기분이 한결 나아졌습니다.


  열한 시, 이른 점심을 먹었습니다. 양배추 샐러드와 뇨끼, 그리고 카이막을 주문했습니다. 다랑은 뇨끼를 처음 먹는다고 했습니다. 음식이 따뜻하고, 맛있었습니다. 라자냐를 맛보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재료가 없어서 먹지 못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등산화를 사러 매장에 갔습니다. 진도 관매도에서 국립공원 스탬프 투어 섬 플러스 바다 마지막 인증을 성공했을 때, 곁에 있던 다랑이 축하 선물을 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비싸고 좋은 새 등산화를 선물했습니다. 헬리오스는 난생처음 신어보는 캠프라인 제품이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새 등산화보다 더 비쌌습니다.

  "고마워, 오빠! 잘 신을게."

  "돈 낼 때만 오빠지?"

  "그럼요 돈 많으면, 누구든 형님이죠."

상점 사장님이 한 마디 거들었습니다.


  새로 맺은 인맥과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추억들을 쌓았고, 값진 선물들도 받았습니다. 등산화를 산 다음날, 멘티와 둘이서 함양으로 등산을 갔습니다. 주차장에서 마주친 등산객들은 대부분 장수 장안산으로 향했습니다. 블랙야크 명산 100 인증지입니다. 몇 년 전, 산악회원들과 다녀온 기억을 더듬었습니다. 다들 어디서, 무얼 하며 지내고 있을까요?

  다랑과 함께 새 등산화 인증 사진을 찍고, 영취산과 백운산 두 개를 모두 인증했습니다. 중등산화라서, 굉장히 무거웠습니다. 가벼운 등산화를 선호하는 터라, 새 등산화가 낯설었습니다. 발이 좀 불편해서, 내내 거추장스러웠습니다. 반면, 다랑은 비싸고 좋은 등산화 덕택인지 성큼성큼 잘 올랐습니다.

  영취산 정상석에서 다랑이 직접 요리한 돼지고기 안심을 곁들인 도시락을 맛있게 나눠 먹었습니다. 다랑은 정상석 부근에서 뱀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어디? 나 못 봤어!"

  "여기 구멍으로 쏙 들어가 버렸어."

  "아쉬워라."

  다랑은 하산할 때도 뱀을 발견했습니다.

  "여기, 뱀!"

  "이야, 너 관찰력이 참 좋다. 네가 말 안 했으면, 난 또 못 봤을 거야."


  영취산에서 백운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완만했으나, 키가 사람 만한 조릿대 군락지를 지날 때 힘겨웠습니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눈을 다칠까 봐 염려하며 통과했습니다.



  흰 구름산이란 뜻의 백운산은 같은 이름의 전국 삼십여 개 산 중 가장 높고, 사방이 탁 트인 훌륭한 조망대입니다. 산정에 눈과 구름이 많은 것이 특징입니다. 섬진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으로 행정구역은 전북 장수군 번암면과 경남 함양군 백전면, 서상면입니다. - 정상석 뒷면 안내문



  백운산 정상의 그늘에서 돗자리를 펴고 앉아 간식을 먹었습니다. 다랑의 팔뚝에 앉은 곤충 두 마리가 열심히 교미 중이었습니다.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몇 초 안 지나서, 둘이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아, 끝났다!"

다랑이 말했습니다.

  '미물들도 참 열심히 산다. 남의 정사를 훔쳐봤네.'

혼자 생각했습니다.

  "서른아홉 살까지 미혼이면, 다랑 데리고 살아야겠다."

  실없는 소리를 하자, 다랑이 웃었습니다. 아마, 그런 말을 평생 못 들어봤을 터였습니다.

  하산하던 도중, 영취산과 주차장 이정표가 있었습니다. 영취산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주차장으로 진입했습니다. 인적이 드문 등산로 같았습니다. 표지판은 있었지만, 지도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들머리 인근에서 부부목(夫婦木)을 발견했습니다.



수종: 층층나무

장안산 무룡고개에서 살고 있는 양관식 씨가 산책을 하다가, 사랑하고 있는 부부목을 처음 발견했습니다. 며칠 전, 꿈에 영취산에서 도인이 타나나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습니다. "사회 환경이 많이 좋아졌는데도, 이혼 가정이 늘어가는 꼴이 안타깝다. 이 다정한 모습을 세상에 알려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데 귀감이 되도록 해라." 하며 사라졌다고 합니다. - 부부목 안내문



  이혼 가정이 흔한 요즘 세태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하는 문구였습니다.

  '결혼은 어려운데, 이혼은 너무 쉽네...... 둘 다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귀갓길에 휴게소에서 핫바를 먹었습니다.

  "'도깨비 핫바'는 무슨 맛일까?"

매콤한 맛이었습니다. 허기가 져서, 핫바를 두 개나 먹었습니다. 다이어트 중인 다랑은 겨우 한 입씩 맛만 보게 했습니다.

  석식으로 맛있는 아구불고기를 먹었습니다. 아구를 숯불에 매콤하게 볶아내고 직화로 불맛을 살린 훌륭한 음식이었습니다.

  "누나가 살게."

  "아냐, 내가 낼게."

다랑이 계산했습니다. 아까 무더위에 기진맥진했는데, 음식이 들어가니 그런 고생은 한방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배부르고, 만족스러운 일요일이었습니다.



한자 습득 +1 수리 취(鷲)
뱀이 숨었다는 구멍. 난 못 봤는데... 까비!
물레나물


 

  

매거진의 이전글 [블야 섬&산 81좌] 신안 우이도 상산봉(361m)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