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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히 Jul 23. 2023

[장수] 봉화산, 광대치, 중재

  칠 월 내내 연이은 전국적인 폭우 때문에 심각한 피해 상황이 잇달았습니다. 도시에 살고 있기에 특별히 겪는 자연재해는 없었으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버스를 타고 귀가하는데, 도로가 통제됐습니다. 하천이 범람해서 도로가 침수된 모양이었습니다. 버스 승객들은 저마다 불안한 심정으로 웅성거렸습니다.

  "작년엔 이렇지 않았는데! 올해는 심각하네......"

  "역대급이다! 재난 영화 같아!"

  지나야 할 길을 가지 못해서, 버스 기사는 다른 경로로 우회했습니다. 다음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이 만약 있었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황당했을지에 대해 떠올렸습니다.

  대중교통이 하천을 따라 질주하는데, 창 밖 풍경은 마치 밀림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분명 지면이어야 하는 곳이 온통 물바다였습니다. 나무들이 모두 물에 잠겨 있어서, 그 광경을 보고 순간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대로 도시도 잠기는 거 아냐? 아, 무서워!' 

  한참 다른 동네를 달리다가 가까스로 정상적인 노선에 진입했습니다. 중간에 정류장 두 개는 그냥 건너뛴 상태였습니다. 자연재해를 이토록 가까이에서 경험하니, 인간은 자연 앞에서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쁨과 즐거움이지. 잠깐이지만, 죽음을 보고 왔네!'

  보도된 침수 피해 사례를 접하자, 겁이 덜컥 났습니다. 다랑에게 연락해 등산을 취소하자고 말했습니다.

  "비 와도 가려고 했는데, 가는 도중 차가 물에 잠기겠어. 다음에 가자."

그는 아쉬워했으나, 곧 수긍했습니다.

  다음날, 그는 오전 일찍 연락했습니다.

  "장수 비 안 오네."

일기예보를 확인했습니다. 다랑의 말대로였습니다.

  "어, 그러네." 

  "오전에 확 내리고, 오후엔 이슬비 수준일 것 같아. 아쉽지만, 미련을 버려야지. 등산도 못 가고, 누나도 못 보고."

그의 마음 상태를 헤아려, 미끼를 던졌습니다.

  "미련이 남으면 지금이라도 가든지."

  "응, 오후에 갈까? 델리만쥬 사줄게."

델리만쥬는 좋아하는 간식이지만, 살찌는 음식이라서 경계해야 합니다. 음식으로 유혹하는 그의 말에 못 이기는 척, 그냥 넘어갔습니다. 

   열세 시, 봉화산으로 출발했습니다. 가는 도중 청아한 하늘이 보였습니다. 반가웠습니다.

  "비 안 오겠네, 하늘이 맑잖아!"

  폭우로 인해 임도의 상황은 혼란스러웠습니다. 다랑이 차에서 내려 쓰러진 나무를 옮기고, 다시 주행했습니다. 느릿느릿 조심히 한참을 올라서, 봉화산 들머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빗물에 씻긴 하늘과 나무들이 여느 때보다 선명한 색을 뿜는 중이었습니다. 탁 트인 시야에서 내려다본 조망은 훌륭했습니다. 지리산 자락이라서, 과연 경치가 빼어났습니다.

  "와, 경치 좋다!"

  키 큰 다랑이 수풀을 헤치며 성큼성큼 앞서갔습니다.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빗물에 옷이 다 젖었어!"

  "네 덕분에 난 안 젖었네."

  며칠 전, 다랑이 준 수박을 작은 밀폐 용기에 담아 왔습니다. 정상에 도착해 간식을 나눠 먹었습니다. 다랑은 미처 간식을 싸 오지 못했습니다.   

  "나 사진 좀 찍고 올게."

  칼로 반듯이 자른 정사각형의 수박 한 조각을 들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파란 하늘과 싱그러운 초록 세상과 대조적인 수박의 빨간색이 조화로웠습니다.

  다랑에게 영상 촬영을 부탁했습니다. 자세를 바로잡고, 허리를 곧추세웠습니다. 다랑에게 신호를 보냈습니다.

  "자, 지금 뛴다! 어?"

 오래간만에 본 청청한 하늘 아래에서 토끼처럼 깡충 힘껏 뛰어올랐습니다.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흡족했습니다. 멘티에게도 요령을 알려줬습니다. 차차 연습하면, 좋은 사진이 나올 터였습니다. 

  두 번째 목적지인 광대치에 도착하니,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임도를 지나 정상 가까이 차로 한참 올랐습니다. 약초 재배지가 있어서, 임도는 봉화산보다 비교적 정비가 잘 돼있었습니다. 하지만, 등산로에 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와, 등산 경력 육 년 차에 이런 현상은 처음이야!"

  산에는 밤이 일찍 찾아오므로, 우리는 서둘러야만 했습니다. 감기에 걸려서, 괴로웠습니다. 다랑이 이끄는 대로 손을 붙잡고, 가파른 언덕을 올랐습니다. 습기 때문에 땀이 비가 되어 내렸습니다. 약 이십여 분 후, 표지석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배우고 있는 한국 무용에 관해 멘티가 묻길래, 이정목 앞에서 춤사위를 조금 선보였습니다. 멘티가 흉내를 냈지만, 상당히 어설펐습니다. 남은 수박을 마저 먹고, 빠르게 하산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목적지인 중재만 남았습니다. 

  중재 입구에 들어섰는데, 해가 벌써 저물었습니다. 비포장 도로는 영락없는 계곡으로 변했습니다. 물이 콸콸 넘쳤습니다. 목적지 근처까지 차를 타고 거의 다 올랐지만, 더 이상 이동할 수 없었습니다. 

  식사를 제대로 못하고, 과일만 먹어서 무척 허기가 졌습니다. 간식을 챙기지 못한 멘티가 굉장히 미안해했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인증하고 가자."

각오를 단단히 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저기 이정목 있어."

다랑이 말했습니다. 그는 시력이 좋습니다.

  "그래? 어두워서, 잘 안 보여. 휴대전화 손전등 좀 비춰 줄래?"

발걸음을 잠시 멈췄습니다.

  "크릉."

분명, 짐승의 거친 숨결이었습니다. 어둠이 서서히 깔리고, 부슬비까지 내렸습니다. 겁에 질려 사색이 됐습니다. 산에서 여태 만난 동물이라고는 기껏해야 사슴이나 다람쥐, 청설모, 뱀이나 개구리 따위였습니다. 하지만, 산에는 분명 멧돼지나 곰처럼 위협적인 생명체도 살고 있습니다. 

  "곰이면, 보고 싶었는데."

다랑이 실없이 말했습니다.

  "그런 말 하지 마."

  "칼 있거든. 혹시라도 곰이 나오면, 내가 어떻게 되더라도 지켜 줄게.'

멋진 대사였지만, 한가롭게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오, 아냐. 우리 둘 다 죽어!"

서둘러 이정목에서 인증했습니다. 불안한 심정으로 왔던 길을 부랴부랴 되돌아갔습니다. 다랑이 앞서 가며 손전등을 비췄습니다. 조마조마한 가슴을 안고, 무사히 차로 되돌아왔습니다. 약 백 미터 남짓되는 평지였습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휴게소에 도착했으나, 식사 대부분이 매진이었습니다. 결국, 편의점 김밥 세 개를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었습니다. 델리만쥬도 역시 못 먹었습니다. 아쉬웠습니다.

  우중산행일 거라 예상했으나, 의외의 풍경을 만났습니다. 갠 하늘을 만끽했고, 마추픽추를 연상케 하는 풍경을 즐겼습니다. 물길이 아닌 곳에서 흐르는 물줄기를 거스르며 산을 올랐고, 어둠 속에서 위험한 야생 동물의 존재를 느꼈습니다. 달콤한 고백 비슷한 말을 들었으나, 겁에 질려 납량 특집이 따로 없었습니다. 한여름 밤의 추억으로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산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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