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정말? 너, 형제는 어떻게 돼?”
수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편으론, 동지를 만나서 반갑기까지 했다.
“난 여동생이 하나 있어.”
“그렇구나. 난 오빠가 하나 있어. 우리 은근히 공통점이 많네!”
“우리 가족들도 역시, 간 이식 수술할까 생각했어.”
“헉! 그래서?”
“어머니가 반대하셔서, 수술 안 했어.”
그 순간, 수라는 세상에서 규필이가 제일 부러웠다.
‘그래, 보통의 정상적인 부모라면 자녀에게 간 이식 수술을 절대 강요하지 않겠지.’
“그럼, 아버지는?”
짐작할 수 있는 결말이었지만, 수라는 그 결말을 확인하고 싶었다.
“… 결국, 돌아가셨어.”
“저런, 그렇구나……. 힘들었겠다. 언제 적 일이야?”
“몇 년 됐어. 아버지 돌아가신 후로,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어.”
“어째서? 혼자보단 모여 사는 게 합리적인데.”
“경제적으로 어려워졌거든. 각자도생하는 거지. 서로 연락도 거의 안 하고, 안 만난 지 꽤 됐어.”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수라는 규필로부터 취업 소식을 들었다. 수라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규필의 어머니는 어째서 자신의 배우자를 살리지 않겠다고 결정했을까?
그저 단순히, 자식들을 고생시키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을까? 고인의 심정은 어땠을까? 본인 스스로가 경제적으로 가족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인 것일까?
이와 대조적으로, 수라의 어머니는 자신의 배우자를 필사적으로 살리기 위해 혈안이 됐다. 어쩌면, 아버지의 경제적 효용 가치가 남았기 때문에 살리고자 함이 아닐까.
‘대체 재개발은 언제 되는 거야! 낙후한 동네에서 산 지, 벌써 12년째인데.’
수라의 부모는 시내동의 기약 없는 재개발을 기대하며, 여기저기 토지와 주택 그리고, 건물을 매입했다. 대출을 받아 투자하는 듯 보였다. 수라의 가족이 살고 있는 대림시 대정구 시내동은 이름만 번화할 뿐, 낙후했다.
시내동은 번화가에서 멀찍이 떨어진 변두리 외딴곳에 위치했고, 지하철도 역시 없었다. 대정구 자체만 보더라도, 백화점은커녕 영화관과 마트도 아예 없는 지역이었다.
수라는 이후로도 쉬지 않고, 쭉 동창들을 만났다. 어떤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도 되는 양, 쉬지 않았다. 그런데, 동창 중에 굳이 만나지 않았도 됐을 뻔한 이가 한 명 있었다. 바로, 형주였다. 수라는 형주에 대해 유쾌한 친구라고 기억하고 있었으나, 무려 17년 만에 만난 형주는 실망스러웠다.
일요일, 수라는 형주와 식사를 마치고 칵테일 바에 갔다. 수라는 숙취가 심한 편이라서,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분위기 좋은 바를 발견했기에 이번만은 예외였다. 예쁜 잔에 담긴 신비로운 칵테일에 대해 수라는 막연한 관심과 동경을 간직한 터였다.
“형주는 이런 데 와봤어?”
“아니! 처음이야. 이런 덴 여자랑 오는 데잖아. 남자들이야 소주나 마시지.”
“너, 지금 여자 친구 없어?”
“어, 정곡이네. 사실, 나 모솔이야.”
“응? 그게 정말이야? 왜?”
“그러게…….”
“서른 살인데 연애 고자라니, 말도 안 돼!”
“진짜야……. 놀리지 마!”
수라는 적잖이 충격이었다. 형주는 인상도 서글서글하고, 덩치도 우람한데 왜 애인이 없을까. 수라는 형주에게 딱히 이성으로서의 호감은 없었기에, 더 이상 파고들면 안 되겠다 싶어 질문하기를 멈췄다.
그런데, 듣지 말았어야 할 말을 결국 듣고 말았다.
“… 가끔 여자 만나고 싶으면, 그런 데 가기도 해.”
“그런 데가 어디…, 아아!”
수라가 놀라서 형주를 쳐다보자, 그는 수줍게 눈을 내리깔고 웃었다.
‘병신이네! 아무리 동창이라지만, 여자 앞에서 그딴 말을 지껄여? 어휴, 남자 망신이다. 빨리 일어나야지!’
수라는 속으로 욕을 지껄였지만,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다. 괜히 둘이서만 만났다 싶어 후회가 막심했다.
애초에 형주와 함께 만날 만한 다른 동창이 없기에, 단둘이 만난 것이었다. 이성과 둘이서만 만나니, 하소연할 곳도 없고 이런 역겨운 상황이 생기고야 만 것이다.
이렇게 쉬지 않고 동창들을 만나다 보니, 어느 순간 수라는 더 이상 만날 상대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온라인의 힘을 빌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과 대화했다.
수라가 처한 억울하고 기구한 상황을 낯선 타인에게 털어놓으니, 오히려 현실에서 보다 많은 응원과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반면, 현실에서는 우습게도 수라의 편을 드는 이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널 낳아 주시고, 길러주신 아버지잖아. 딸인 네가 아버지를 살려야 하지 않겠어?”
“간은 일부를 절제해도, 다시 자란다더라. 물론 무섭고, 괴롭기도 하겠지. 하지만, 일단 네가 희생하면 아버지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거잖아?”
틀린 말은 아니나, 그건 수라의 입장이 아니라 철저히 부모의 입장만 생각하는 의견이었다. 수라가 간 이식 수술을 하지 않으려는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수라가 늦깎이로 대학원에 입학해 기숙사 사감으로 근무하며, 시외에서 머물 때였다. 여름에 부모와 서울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부모와 헤어질 무렵이었다.
“저는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택시 타고 가려고요. 짐도 무겁고, 너무 피곤하네요.”
그러자, 아버지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졌다.
“돈 아까운 줄 모르고 택시를 타? 지하철 타고 가!”
수라는 화들짝 놀랐다. 아버지의 표정은 장난을 치거나, 잔소리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정말 진지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이게, 그렇게 화낼 일인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