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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히 Oct 25. 2024

수업

  불안감이 덜컥 엄습했다. 분노와 초조함, 억울함 등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밀려왔고, 서서히 잠식당하는 기분이었다. 심호흡하고, 숨을 멈추라는 안내방송에 따라 수라는 침착히 따랐다. 기계에 비친 잔상이 일그러져 보였다. 

  다음 날에는 정신건강의학 상담이 있다는 안내를 받았다. 간 이식 수술을 해도 무리가 없을지, 기증자의 정신 상태를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통해 사전에 점검하는 모양이었다.

  ‘그딴 걸 왜 한담? 돈 벌려는 상술로밖에 안 보이는데. 연속으로 이틀을 내원하라니, 예약이 왜 이따위야? 당일에 모두 마칠 수 있도록 방문자의 편의를 병원 측에서 배려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일해야 해. 절대 못 온다!’

  1차 검사 결과는 며칠 후에 나올 예정인데, 검사를 받은 본인만 의사와 상담이 가능하다고 들었다. 수라는 어머니에게 붙잡혀 엉겁결에 서울까지 왔지만, 검사 결과가 제발 부정적이길 간곡히 바랐다. 물론, 병원을 재방문할 의사는 추호도 없었다. 

  다음날, 현영이 수라를 사무실로 불렀다. 현영이 진지하게 말했다.

  “수라 씨가 하루 결근하는 바람에, 원생이 가장 많고 수업도 가장 많은 여울 유치원은 다른 강사에게 넘어가고 말았어요.”     

  “아, 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곤란하셨죠. 정말 죄송해요……. 저도 빠지고 싶지 않았는데, 강제로 끌려간 거예요…….”

   회사에서 미술 강사는 수라가 유일한데, 다른 강사라 함은 퇴사한 선임 직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수라가 알기론 선임은 야무지고, 근무 평가도 우수한 모양이었다.

  “저기, 그 선생님은 왜 퇴사하신 거예요? 예전에 수업했던 유치원에선 그분에 대해서 칭찬이 자자하던데요.”

  “창업하고 싶대요. 남 눈치 보면서 직원으로 일하는 것보단, 아무래도 자기 사업하고 싶겠지! 이해는 돼요. 월급 더 줄 테니까, 제발 퇴사하지 말라고 붙잡았지만 결국 가버리더라고요. 어쩔 수 없지, 뭐.”

  수라도 일전에 인수인계를 받으러 퇴사자와 만난 적이 있다. 그녀는 현재 월세 저렴한 동네에서 교습소를 홀로 운영 중이었다. 수라가 교습소에 찾아갔다.

  그런데, 수라의 기대와는 달리 원장의 첫인상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잘 웃지도 않고, 냉랭한 표정이었고,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였다.

  ‘아무리 봐도, 아이들한테 인기 있을 만한 외모나 분위기는 절대 아닌데……?’

  “예전 선생님, 참 좋은 분이었어요! 수업도 잘하시고, 아이들하고 관계도 원만하시고. 아이들하고 한 약속은 사소한 것도 잊지 않으시고, 섬세하게 챙기시더라고요. 그런데, 그만두셨다니 아쉽네요!”

  수라가 다른 유치원에 출근했을 때, 교사로부터 들은 내용이었다.

  ‘대체,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어른한텐 태도가 싸늘하던데, 애들한테만 살가운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군…….’

  유아 수업은 생경했다. 누리 과정인지 뭔지, 유치원도 나름 교육 체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수라는 지침서를 보며 수업 계획을 세우고, 재료를 주문하고, 수업 방식을 고민했다. 수업 재료 중 압정이 필요했는데, 계획서를 본 현영이 조언했다.

  “압정이 꼭 필요한 건가요? 유아들한테 위험해요. 혹시 눈을 찌를 수도 있잖아요. 그럼, 굉장히 곤란하겠죠?”

  “아, 그러네요! 그래도 실을 고정하려면 압정이 필요한데, 아예 안 쓰는 게 좋을까요? 대체할 만한 재료가 있으려나……”

  “지침서에 뭐라고 나왔어요? 아, 압정이 없으면 안 될 것 같기도 하네. 휴, 미술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네. 수라 씨가 스스로 판단하세요.”

  다행히, 압정 때문에 사고가 나진 않았다. 수업 시간은 고작 20~30분인데, 다수의 유아를 상대하느라 수라는 쩔쩔맸다. 압정을 판에 고정해 도형을 만들고, 목공용 풀로 점과 점 사이를 이어 선분을 이은 후, 털실을 붙이는 거라고 수라는 유아들에게 설명했다.

  그런데, 목공용 풀을 주니 유아에게 난리법석이었다. 욕심쟁이 유아가 목공용 풀을 잔뜩 짜버려서 소진되자, 다른 아이는 쓸 수 있는 재료가 아예 없었다.

  “선생님, 풀이 없어요!”

  “아, 여기 있어! 이거 쓰렴.”

  “어, 이것도 안 나와요.”

  “어머! 뚜껑을 안 닫아서, 굳었나 봐.”

  다음 시간부턴 재료를 더욱 충분히 준비해야겠다고 수라는 다짐했다. 수업을 마친 후, 승용차에 타자 현영으로부터 호출이 왔다.

  ‘수업 마치고, 사무실로 오세요. 할 얘기가 있어요.’

  수라가 사무실에 도착하자, 현영이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여울 유치원에서 연락이 왔는데, 선임 강사에게 수업을 쭉 맡기겠다고 하네요. 아무래도, 수라 씨가 첫 수업 때 결근해서 그런가 봐요. 두 번째 수업부터 수라 씨가 나갈 수 있다고 말했는데, 유치원 측에서는 곤란하대요. 미안해서, 어쩌지?”

  “아, 결근해서 그렇게 된 건데 어쩔 수 없죠. 죄송해요. 그럼, 목요일 제외한 다른 요일은 계속 이대로 출근하면 될까요?”

  “그것도, 문제란 말이지. 수라 씨, 집은 알아봤어요? 자취 시작하는 거야?”

  “전세는 너무 비싸서, 월세로 알아보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 가진 돈이 없어서 당장 독립하긴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요.”

  “그럼, 간 이식 수술할 거예요?”

  “모르겠어요……. 저 정말, 어쩌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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