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이 상태로는 회사 입장이 곤란해요. 수라 씨가 아직 일이 서툴러서, 경력자로서 내공을 쌓으려면 시간과 노력 그리고, 돈이 필요하잖아요?”
“네, 정말 죄송합니다.”
수라의 고개는 점점 수그러들었다. 부모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고용인으로부터 이런 꾸중을 들으려고 취업한 건 아니지 않은가. 현영은 많이 고민한 끝에 어려운 결정을 내린 듯 보였다.
“간 이식 안 하고 독립하는 게 확실하면, 일을 맡겨도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간 매칭 검사를 받으러 갔다니 언젠간 수술도 억지로 하게 될 수 있겠네요. 불확실한 태도로 계속 미래를 함께 가는 건 안 돼요. 또, 유치원 측에서 수라 씨에게 불만 접수가 나오기도 했고요. 1년 계약직인데, 확실히 그 기간은 채우고 퇴사해야 서로 피해를 안 보죠. 여울 유치원 수업이 가장 고소득인데, 그걸 놓쳤으니 급여가 얼마 안 될 거예요.”
“얼마인데요?”
“여울 유치원 수업 제외하면, 고작 100만 원 미만이에요. 그래도, 계속 근무할 수 있겠어요?”
현영의 태도는 아무래도 수라가 자발적으로 퇴사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수라도 바보가 아닌 이상,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현영의 말투는 적은 급여가 부담스럽겠지만, 앞으로 좀 더 노력해 보자는 의도가 절대 아니었다.
“그럼, 아무래도 어렵겠네요. 퇴사할게요. 그간 감사했어요.”
“그래요. 수라 씨 집안 상황이 너무 딱하네. 나중에 기회 되면, 우리 또 봐요.”
사업주는 득달같이 직원의 의사를 수락했다. 작별 인사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이었으나 수라는 예감할 수 있었다. 현영과 재회할 일은 아마 다시없으리라.
간 매칭 검사를 받고 오래 지나지 않아, 검사 결과가 나왔다. 본인 외에는 검사 결과를 들을 수 없을 거라고 하던 말과는 달리, 이번엔 어머니 혼자 서울 금와 병원에 다녀왔다. 수라는 잔뜩 긴장한 채, 어머니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아버지, 아들, 딸 모두 일반인보다 간이 작단다. 장기의 면적 자체가 작기 때문에 혼자서는 수술 도중 사망할 위험도 있다네. 2명이 조금씩 절제해서, 아버지에게 이식해야 된대. 2대 1로 총 3명이 수술하는 거지."
청천벽력이었다. 수라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이게 무슨 개똥 같은 소리야? 나까지 수술하라는 거잖아! 안 되겠다, 어서 이 집구석을 빠져나가야지!’
하지만, 해고당한 거나 진배없는 실직자 수라의 수중엔 푼돈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 마당에 독립 따위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어머니는 더 이상 수라에게 간 이식 수술을 강요하지 않았으나, 이번엔 아들이 문제였다.
‘아버지에게 간 이식 수술하지 않을 거면, 당장 집을 나가!’
오빠로부터 온 협박 문자였다. 수라는 공포에 떨었다.
그날부터 수라는 닥치는 대로 지인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지푸라기라도 부여잡고픈 심정이었다. 때마침, 수십 년간 연락하지 않았던 초등학교 동창들과 갑자기 연락이 닿은 시점이었다.
남자 동창 중 한 명이 결혼을 앞두고 있어서, 불특정 다수가 모인 단체 대화방이 개설됐다. 수라는 동창들에게 만나자고 먼저 제안했고, 가까운 시일 내에 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
소영, 다나를 시청역 어느 카페에서 만났다. 동성인데도 불구하고, 분위기가 데면데면했다. 직장 생활, 연애담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눴는데, 특별히 접점이 없었다.
소영은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는 원장이었고, 다나는 회사원이라고 했다. 반면, 수라는 대학원 석사 수료를 한 학기 앞둔 실업자였다. 소영과 다나 모두 연애 중이었지만, 수라는 남자 친구는커녕 썸 타는 상대조차도 없는 실정이었다.
반면, 두호와 규필을 만났을 땐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이성들은 웃는 낯으로 수라를 반겼다.
“이렇게 얼굴 보니까, 반갑다!”
“그러게. 이게 얼마 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어, 그러고 보니 우리 모두 수라 짝꿍이었네!”
“이야, 그것 참 영광인데?”
두호는 덩치가 살집이 두둑했다. 수라는 적잖이 실망했다.
‘어릴 적 귀여운 모습을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네.’
그는 마트에서 정직원으로 근무 중이라고 했다. 대기업이고, 안정적인 조건이었다.
반면, 규필은 초등학생 시절의 얼굴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으나 키마저 그때 그대로였다. 결정적인 흠이었다.
‘아니, 초딩 때 성장판이 닫혔나? 어떻게 그때보다 1도 안 자랐어? 세상에, 165cm 언저리네. 키가 나만 하잖아!’
게다가, 그는 다소 야윈 형색이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안색도 눈에 띄게 어두웠고, 잘 웃지도 않았다. 한편, 규필은 서울의 어느 사립대학교 졸업생이라고 했다.
“으뜸대학교면, 등록금 비쌌겠다! 전공이 뭔데?”
“흔하디흔한 경영학.”
“그럼, 전공 살려서 근무하는 중이야?”
“아니!”
초등학교 시절 성적은 별 영향력이 없지만, 규필의 성적은 초등학생 때도 상위권이었던 것으로 수라는 기억했다. 규필은 주식 투자업을 한다는데, 수라가 보기엔 그저 무직 상태로 보였다.
‘30대 젊은이라면, 제대로 된 번듯한 회사를 다녀야 하지 않나? 주식은 그냥 돈만 좇는 것 같잖아. 아, 나도 현재 무직이지. 쉽게 남 말할 때가 아니로군!’
놀랍게도, 규필은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다. 수라가 아버지에게 간 이식해 드리는 문제에 대해 먼저 말꼬를 트자, 그가 대답했다.
“우리 아버지도 간암 환자셨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