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박하는 안내 산악회 버스를 타고 혼자 산에 갔다. 특별히 동행하는 이가 없어서, 그녀는 내내 혼자였다. 박하는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내디뎠다. 경사가 가팔랐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박하는 뱃속에서 허기가 느껴졌다.
'아고고, 죽겠다! 점심시간이니, 일단 식사부터 할까?'
박하는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배낭에서 주섬주섬 도시락을 꺼냈다. 그녀는 반찬통과 밥통을 보기 좋게 배열하고, 사진을 한 장 찍어서 단체 대화방에 공유했다.
"짠! 등산 중 점심 먹어요. 맛점!"
사진을 본 동호인들은 각기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와, 어느 산 갔어?"
"구미 금오산 갔대요."
레브가 박하에게 묻자, 스카가 대신 대답했다. 그러자, 레브가 의문을 제기했다.
"스카는 박하가 등산 간 거, 어떻게 알았어?"
"다 아는 수가 있죠. 하하."
레브는 심각했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불안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박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둘이 썸 타는 중인가 보군. 흥! 내 연락은 철저히 무시하면서......'
그녀는 응답이 없었다. 레브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연락했다.
"친구! 나도 등산 좋아해. 나랑 등산 가자!"
같은 시각, 산에서 식사 중이던 박하는 레브로부터 온 연락을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답을 안 하고 계속 무시하는데도, 왜 줄기차게 연락할까? 눈치가 전혀 없는 거야? 질린다, 진짜......'
그녀로부터 답이 없는데도, 레브의 구애는 지칠 줄 몰랐다.
"등산 중이라서 바쁜가? 예쁜 내 친구, 보고 싶다."
박하는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내면의 화산에서 용암이 분출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답답함에 몸서리질치며 외쳤다.
"으악, 너무 싫어! 더는 안 되겠어. 최후의 수단!"
한편, 스카는 현장에서 근무 중이었다. 거대한 기계가 위잉 위잉 육중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스카의 휴대전화 알람이 울렸다.
"스카! 레브 때문에 나 짜증 나."
'응? 대체 무슨 일이길래......'
박하는 레브의 귀찮은 구애를 전혀 받아줄 마음이 없지만, 딱히 거절할 구실이 없어서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뭐라고? 레브 형이 박하 누나를? 안 돼! 이렇게 뺏길 순 없지.'
그건 일종의 질투심 유발 작전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스카는 박하의 덫에 덜컥 걸려들었다.
"박하 누나, 우리 오늘 꼭 만나요! 레브 형이랑은 절대 만나면 안 돼요. 알았죠? 누나한테 꼭 할 말이 있어요."
"그래, 알겠어. 할 얘기가 뭘까 궁금하네."
박하는 싱긋 웃었다.
'후후, 기대되는군! 쉽게 풀리려나?'
박하는 가까스로 정상에 도착했다.
'사진 촬영하고, 어서 하산해야지. 응? 스카한테 연락 왔네.'
"누나 생각 중."
스카는 공사 현장을 배경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찍은 사진을 박하에게 보냈다. 그의 손가락은 엄지와 검지를 비스듬히 포개 만든 하트였다. 박하도 역시 하트 모양을 표현한 손가락을 정상석과 함께 촬영해 스카에게 전송했다.
'귀엽군!'
스카는 설레는 마음으로 현장에서 열심히 일했다.
'하트 손가락! 그럼, 박하 누나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박하는 안내 산악회원들 중 매번 꼴찌였다. 그녀는 집합 시간을 확인하며, 부리나케 하산했다. 안내 산악회원들은 대개 은퇴한 노인들이었는데,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대부분 산신령 같은 속력을 과시했다.
'다들 축지법을 쓰시나, 어쩜 그렇게 빠른 거람......? 휴, 좇아가는 뱁새 가랑이 찢어지겠네! 아, 등산 너무 힘들어. 순간 이동해서 집에 가고프다.'
박하는 전망대에서 잠시 멈추고, 물을 마셨다. 바로, 그때였다. 난간에 기대어 있던 등산 스틱 중 하나가 주룩 미끄러졌다. 스틱은 데굴데굴 굴러서 저만치 떨어지고 말았다.
"앗, 내 비싼 등산 스틱이......!"
그녀가 망연자실한 채로 광경을 지켜보자, 등산객들이 주변에서 몰려왔다.
"에구머니! 스틱이 낭떠러지로 떨어졌어요?"
"블랙 다이아몬드? 비싼 건데......"
"아가씨, 내가 스틱 주워 올게요."
한 남자 등산객이 나섰으나, 박하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아, 아니에요! 제 물건이니까, 스스로 해결할게요! 저 좀 도와주세요."
"위험한데...... 조심해요!"
박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정신 바짝 차리자.'
그녀는 난간 아래로 내려가 벼랑에 떨어진 등산 스틱 하나를 신줏단지 모시듯 조심스럽게 구출했다. 그 과정에서 박하는 사시나무 떨듯 와들와들 떨었다.
"스틱 먼저 받아 주세요!"
"그 스틱 꽉 잡고 있어요. 내가 당길게요!"
남자 등산객이 박하를 구출했다.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박하는 허리를 숙여 깍듯하게 인사했다. 그러나, 인사말과는 달리 박하의 전신은 두려움에 덜덜 떨렸다. 무릎이 후들거렸다. 그날 저녁, 박하가 스카에게 이 사연을 털어놓자 스카는 마치 자신의 일인 양 걱정했다.
"누나, 고작 스틱 하나 때문에 그런 위험을 무릎 쓰다뇨!"
"이제, 괜찮아. 네가 걱정해 주니, 기분 좋다."
"헤헤, 그래요?"
박하는 스카에게서 다정함을 느꼈다.
"저도 오늘 사건 하나 있었어요. 현장 거래처 사장님이 금액을 깎으려고 해서, 속상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
"휴, 주시는 대로 받았죠. 이럴 땐, 진짜 맥빠져요. 열심히 일했는데, 제값도 못 받고...... 이런 게 바로 자영업자의 고뇌죠."
스카의 시무룩한 표정을 보자, 박하는 안쓰러웠다. 그녀는 스카의 기분을 달래줄 묘안을 한 가지 생각했다.
"스카!"
"네, 누나."
박하는 스카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갸름한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당겼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소리가 그들 사이에 작게 울려 퍼졌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