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스카의 질문에 박하가 대답하려던 찰나, 수지가 크게 소리쳤다.
"여기 노루가 있어요!"
"어머, 어디?"
깜짝 놀란 박하는 서둘러 수지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와, 신기해!"
과연, 그곳엔 노루가 두 마리 있었다. 몸집이 큰 노루가 한 마리, 그 뒤에 작은놈이 한 마리 서로 가까이 서있었다. 어미와 새끼인 듯 보였다. 그런데, 미동도 없었다.
"어라, 노루가 안 움직여."
"엥, 설마 조형물인가?"
박하는 호기심이 일었다. 노루에게 근접해 관찰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카와 수지는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레브에게 제안했다.
"노루들한테 가까이 가보자! 따라와."
"뭐?"
"따라오라고. 어서!"
레브는 당황했으나, 얼떨결에 박하의 뒤를 따랐다.
"안녕!"
박하는 짐승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밝게 인사했다. 그러자, 여태 정지 상태였던 노루들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그들은 정자에 앉아 간식을 먹는 관광객들의 음식을 탐내던 중이었다.
"하하, 진짜 살아있는 게 맞구나! 저런, 배고파서 구걸 중이야? 너희가 먹을 음식이 없을 텐데......"
"너무 가까이 가지 마. 물 수도 있어."
"아, 그러네. 이만, 돌아가자."
레브의 조언을 듣고, 박하는 발길을 돌렸다. 그녀는 레브와 함께였지만, 신경은 온통 스카에게 쏠려 있었다. 스카는 수지와 도란도란 대화하며, 앞서 걷고 있었다. 박하는 아까 스카가 던진 갑작스러운 질문에 난처했으나, 때마침 노루가 등장한 덕분에 대답을 회피할 수 있었다.
'저 둘도 잘 어울리네. 아까 나한테 했던 말은 다 뭐람? 그냥, 찔러보기인가? 휴, 침착하자. 생각이 너무 많아.'
수지가 박하에게 물었다.
"언니, 우리 얼마나 더 가야 해요?"
"글쎄, 나도 초행이라서."
마침 이정표를 발견했다. 좌측은 빨강길, 우측은 노랑길이라고 쓰여있었다.
"여기가 주황길인가 봐요."
수지가 추측했다. 박하는 그녀에게 물었다.
"수지는 여행 다녀왔다고 했지? 어디?"
"아프리카 다녀왔어요."
"우와, 아프리카? 대단해!"
박하는 입을 크게 벌리며 소리쳤다. 그곳은 그녀가 미쳐 상상하지도, 가보지도 못한 대륙이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박하는 수지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비용은? 많이 들었지?"
"X, XXX만 원이요."
"끼약, 너 부자구나!"
"하하, 아니에요. 여행 가려고, 돈 열심히 모았죠."
"대단하다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다, 진짜. 아프리카는 가볼 생각도 전혀 못했는데! 가는 것부터 힘들잖아."
"거기서 얼마나 머물렀어? 좋아?"
수지의 여행담에 대해 스카도 관심을 보였다.
"3개월간 지냈는데, 그렇게 오래 머물 줄 몰랐어. 거기서 만난 어떤 남자가 계속 붙잡아서......"
"남자? 그럼, 흑인?"
박하는 놀라서 눈을 치켜떴다.
"그냥, 친구예요. 언니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 절대 아니에요!"
수지가 손사래를 쳤다.
"붙잡았다는 건 뭐야?"
"아, 그건...... 여행 다닐 때, 그 남자가 아낌없이 지원해 줬어요. 호텔을 운영하는데, 공짜로 묵게 해 주더군요. 목적지에 데려다주고, 또 데리러 오고...... 착하고 다정하고, 저한테 잘해줬어요."
"이야, 호텔왕이야? 자상하기까지? 그런데, 왕자님이랑 왜 안 사귐?"
"전 한국인이 좋아요. 외국인은 별로예요. 은근슬쩍 몸 만지는 것도 별로 안 내키고요."
"크윽! 진짜 아깝다!"
박하는 마치 제 일인 양 수지의 경험담에 빠져들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발을 동동 구르며 아쉬움을 표현했다. 한편, 스카의 생각은 달랐다.
'여행비로 돈을 탕진하다니, 아깝군. 쯧쯧......'
여태 조용하던 레브가 말했다.
"우리, 점심도 먹어?"
"전 좋아요!"
스카가 반응했다.
"그럴까? 어디 갈래?"
박하가 의견을 물었다.
"아, 전 집에 가야 해서요."
"밥 먹고 가지, 아쉽게."
"돈이 없어서요. 집에 가서 먹어야죠. 텅장이요."
수지가 귀가 의향을 밝히자, 박하는 수긍했다. 그들은 세 명이서 점심을 먹고, 카페로 향했다. 외부에서 내부로 가는 길에 조성된 수목은 조화로웠다.
"오, 자작나무가 멋지다!"
"이런 멋진 곳이 가까이에 있었군요."
야외의 탁자에 펼쳐진 파라솔 그늘 아래 셋은 마주 보고 앉았다. 평일 오후의 햇살이 한가롭고, 평화로웠다. 스카가 입을 열었다.
"누나, 고마워요."
"응? 뭐가?"
"사람들이랑 어울리고, 밥 먹고, 차도 마시고. 이렇게 좋은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나도 고마워. 내 모임에 참석해 줘서!"
"하하하! 누나, 말을 참 예쁘게 하네요. 얼굴도 고우시고."
한편, 화기애애한 남녀 사이에서 레브는 멀뚱히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침묵하는 레브를 의식한 박하는 의도적으로 말을 붙였으나,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망부석인가? 말 좀 하지, 답답하긴.'
박하는 속으로 레브를 흉봤으나, 겉으론 태연히 굴었다.
"레브는 무슨 일 해?"
"아, 난 철거 작업해."
대화는 그걸로 끊겼다.
'어휴, 너도 나한테 질문이라는 걸 좀 해라. 더 할 말이 없잖아!'
"누나, 오후에 한의원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별안간, 스카가 박하의 일정을 일깨웠다.
"아, 맞다. 이제 슬슬 가야지."
레브는 자연스럽게 대화에 녹아들지 못했고, 그들은 어색하게 헤어졌다. 반면, 스카는 박하에게 관심이 있음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누나, 조심히 가요. 연락할게요."
그런데, 레브는 박하를 귀찮게 굴었다.
"친구, 뭐 해? 보고 싶다."
'헐, 키보드 마스터인가? 용건도 없으면서 끊임없이 연락이 오네. 답이 없으면 눈치를 채야지, 전화를 줄기차게 하네. 어휴, 번호 교환 괜히 했다. 지겨워!'
첫 만남 때,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는 스카를 보고 박하는 그의 의도가 궁금했다.
"누나는 남자 볼 때, 어디 봐요? 누나는, 저 어때요?"
이런 질문으로 미루어 보아, 스카는 자신의 매력을 이성에게 발산하려는 듯 보였다.
'스카는 나한테 관심 있어 보이던데. 먼저 연락해 볼까?'
한의원에서 물리치료를 받던 박하는 침대에 누운 채,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스카, 내일 뭐 해?"
잠시 후, 답이 왔다.
"내일요? 일하죠. 왜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
"데이트 신청인줄 알고, 기대했잖아요! 에잉, 괜히 혼자 설렜네."
"뭐? 아, 웃겨! 나랑 데이트하고 싶어?"
"누나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 내일 저녁에 시간 어때요?"
"나 내일 시외로 등산 가. 좀 피곤할 것 같아."
"아, 그래요? 그럼 안 되겠네요."
"아냐, 시간 내볼게."
스카는 박하에게 적극적으로 반응했고, 그들은 단둘이 만나기로 결정했다. 인간은 누구나, 인정받기를 원한다. 박하 역시 자신을 좋아하고, 아껴주는 상대를 바랐다. 초봄, 박하가 댕댕과 헤어진 시점에서 고작 일주일이 지났을 뿐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