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댕댕은 자신의 자취방에서 자고 있었다. 휴대전화 알람이 울렸다. 그는 느릿느릿 일어나 연락을 확인했다. 여자 친구, 아니 이제 전 여자 친구인 박하로부터 온 문자였다.
"너 보러 가도 돼?"
댕댕은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도,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
'난생처음으로 사귄 여자 친구가 단체 대화방에서 그렇게 보란 듯이 내 험담을 할 줄이야. 잠이 많은 게 그렇게도 큰 잘못인 걸까? 그 정도도 이해 못 해줘?'
박하는 솔직함과 적극성으로 댕댕을 설레게 만든 여자였다.
"댕댕, 내가 천국 보내줄까?"
그녀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끔 댕댕에게 기회를 준 사람이었으나, 교제 사실을 남들에게 알리기를 주저했다.
"우리 사귀는 거 아직은 비밀로 해, 알았지?"
'왜......?'
댕댕은 박하를 의심하기까지 했다.
"누나, 혹시 나 말고 다른 남자 있는 거 아니죠?"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걱정돼?"
"......"
"걱정되면, 나한테 잘해!"
댕댕은 본래부터 묵직한 성격은 못 되었기에, 박하의 바람과는 다른 이야기가 전개됐다. 댕댕이 형, 누나들과 술집에서 어울리고 있을 때였다.
"어이! 오늘따라 왜 폰만 계속 보고 있어?"
31세 남자가 묻자, 댕댕이 대답했다.
"아, 중요한 연락이 와서요."
"중요한 연락? 뭔데?"
그들의 대화를 듣던 32세 여자가 고양이 걸음으로 슬그머니 댕댕의 뒤로 다가갔다.
"흐음, 너 박하 언니랑 연락하는 사이야?"
"악, 깜짝이야!"
"둘이 연락처 교환은 언제 했대?"
"아, 같이 등산 가기로 해서 그거 상의하던 중이었어요."
"오, 그렇구나. 근데, 왜 그리 놀라? 죄지은 것처럼."
"와, 좋겠다! 단 둘이 가는 거야? 모임에서 일정 안 올리고 둘이서만?"
"어어, 왜들 그래요. 나 유도 신문 당하는 것 같은데."
"댕댕, 네가 더 수상한데."
눈치 빠른 형과 누나들은 댕댕에게 애인이 생긴 걸 금방 파악하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박하의 연애 고민 상담은 그들에게 확신을 주었다.
"사귄 지 얼마 안 된 남자 친구가 있는데, 종일 잠만 자요......"
그녀는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으나, 이미 몇몇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들은 모두 놀랐다.
'헉, 이건 댕댕 얘기잖아?'
댕댕도 역시 박하의 하소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댕댕은 이부자리에 풀썩 드러누웠다.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당혹스러웠다. 허공을 보며,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는 그녀의 돌발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일부러 이러는 건가? 나 엿 먹이는 거, 맞지? 이런 게 연애라니...... 내가 오랫동안 꿈꿔 온 연애는 이런 게 아니야!'
댕댕은 박하에게 연락했다.
"뭐 해?"
그녀로부터 바로 답장이 왔다.
"네 험담해."
순간, 댕댕의 귓가에 쿵 하고 바위가 내려앉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댕댕의 첫 연애는 이렇게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채 끝나고 말았다.
"내가 잘못했어. 화 풀어."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갖는 게 좋겠어."
댕댕은 답답한 심정으로 담배를 물었다.
'휴, 다 부질없다! 누나가 비흡연자 좋아한대서 담배 끊은 건데, 이제 금연할 이유가 없군.'
며칠 후, 한동한 연락이 뜸했던 얌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댕댕, 뭐 해?"
"응? 그냥, 집에 있어요."
"나, 깨졌다!"
"헐, 동병상련!"
"나와, 술 마시게!"
"몇 명이나 모여요?"
"이크, 까망, 벼락, 나랑 너 이렇게 다섯."
"콜! 준비하고 곧 나갈게요."
"아, 그렇지 말고 우리 바람 쐬러 시외로 나갈까?"
이렇게 갑자기 모여 떠난 곳은 초봄의 해변이었다. 철썩철썩, 쏴아아 바다는 쉬지 않고 움직이며 이들을 반겼다. 밤이라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개미 한 마리조차 눈에 띄지 않았으며, 오직 다섯 청춘들 뿐이었다. 이들은 무한한 해방감을 느끼며, 한껏 소리 질렀다.
"와, 바다다!"
"우리가 왔다!"
"꺅, 얼마 만에 보는 바다야!"
"이런 즉흥 여행, 최고다!"
얌전은 나부끼는 머리채를 손으로 누르며, 활짝 웃었다.
"멀리 나오니까, 참 좋다. 생각보다 덜 춥네. 시원하다. 댕댕, 운전해 줘서 고마워."
"덕분에 바다도 보고, 좋네요. 저도 고마워요."
"너, 박하랑 헤어졌다며?"
"...... 소문이 참 빠르네요."
"괜찮아?"
"휴, 곧 괜찮아지겠죠."
"누나야말로, 괜찮아요?"
"안 괜찮아!"
얌전은 긴 사연을 댕댕에게 털어놨다. 그런데, 가벼운 마음으로 급히 떠난 나들이가 큰 소용돌이를 몰고 올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고 누가 말했던가? 회원들 몰래 여행 간 사실이 방장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방장은 익명의 제보를 받았다.
"'우리끼리 해수욕장 놀러 왔다! 용용, 부럽지?' 아니, 이것들이 겁을 상실했나?"
이 사실은 순식간에 공론화됐다. 방장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부터 다섯 명, 강제 퇴장합니다. 모임 규정을 위반한 회원들, 변명할 기회를 드릴게요. 입에 있으면 말이라도 어디 해보세요."
단체 대화방에서 벌어진 숙청의 현장을 회원들은 숨을 죽이고 지켜봤다.
"헐, 무서워......"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얌전이 대표로 나섰다.
"내가 이 모임에서 사귀던 남자가 있었는데, 헤어졌어. 기분이 울적해서, 어디 여행이라도 가고 싶었어. 공지 안 올리고 간 건 내가 잘못했어."
그녀가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히자, 회원들도 서로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공지 올리고 모이기 껄끄러운 상황인 건 맞네요. 어색하잖아요."
"반드시 공지를 올리고 만나야 해요? 어차피 우리 목적은 친목이니까, 친해지면 개별적으로 만나도 되지 않나요?"
그러자, 방장이 주장했다.
"우리가 계속 신입 회원을 받고, 투표를 하는 이유는 다 같이 친해지자는 의도에서 그러는 겁니다. 규정은 지키라고 있는 거예요."
투표를 통해 참석자를 모아 모임을 진행하는 방 규정을 어기고, 소수가 비밀리에 개인적으로 모여 독단적으로 행동했다는 죄목으로 다섯 명은 강제 퇴장 당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