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다른 이들이 나누는 대화에 무관심한 척하며, 소연은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그녀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박하 언니가 네 이상형 아니야?"
32살 여자가 불쑥 참견하자, 댕댕이 주먹으로 쾅, 탁자를 쳤다.
"놀리지 마욧!"
반응이 마치 부글부글 끓는 주전자 같았다. 댕댕의 까무잡잡한 얼굴에 홍조가 번지자, 그걸 본 이들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됐다.
'음,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갑자기 박하 언니가 언급됐네. 모두 분위기가 이상해. 나만 모르는 뭔가가 있구나!'
소연이 눈동자가 희번덕 빛났다. 그녀는 일전에도 댕댕을 본 적이 있었다.
"야, 체하겠다!"
31세 남자가 옆에서 한마디 했지만, 댕댕은 아랑곳하지 않고 음식을 입에 밀어 넣기 바빴다. 소연은 그런 댕댕의 모습을 보며, 게걸스럽다고 생각했다.
'어리니까 귀엽긴 한데, 그게 다잖아. 특별히 잘생긴 것도 아니고, 몸매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이 외에 다른 장점이 있나? 흠, 박하 언니 취향이 참 독특하네. 뭐, 취향을 존중해야지.'
소연과 박하는 친목 모임 <대림에서 가장 멋진 30대들>에서 처음 만난 사이었다. 이 모임은 신규 회원이라면 누구나 얼굴 사진을 공개해야 활동할 수 있었다.
'온라인상에서 타인의 얼굴 공개는 절대 맹신하면 안 돼. 사진은 그저 사진일 뿐이거든!'
얼굴 사진을 올리라는 모임 규정에서 강한 외모 지상주의가 느껴지자, 박하는 내심 거부 반응이 들었다. 그러나, 얼굴 사진을 공유하지 않으면 활동할 수 없기에 박하도 소연도 모두 사진을 공유했다. 박하보다 늦게 모임에 합류한 소연은 박하의 얼굴 사진을 보지 못했지만, 박하는 소연이 올린 사진을 봤다. 사진 속 여자는 흰 피부에 청순가련형 미인이었다.
타지에서 대림시로 이사 온 소연은 친구를 사귀고 싶은 마음에 친목 동호회 <2030 정상인 없는 방>을 찾았다. 그런데, 공지된 일정에서 갈래길 산책을 가자는 이를 발견했다.
'어, 박하 언니다! 여기서 또 만나네. 언니도 여기저기 모임 많이 하나 봐. 같이 산책할 사람을 늘 구하는구나.'
소연에게는 박하와 추억이 있었다. 탁 트인 하늘 아래 호수는 적막했다. 소연은 박하와 한적한 교외를 거닐며 자신의 과거 직장 생활과 늦은 대학 진학,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고민 등을 털어놓았다. 박하는 소연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고, 간혹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소연은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한편, 은마는 그녀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져서 걸으며 사색에 잠겼다. 소연이 그에게 물었다.
"직장인이세요?"
"...... 자영업 하다가 지금은 잠깐 쉬고 있어요. 폐업했거든요."
"아, 그러시군요. 쉴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으니, 쉴 땐 푹 쉬어야죠."
그들의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소연도 박하와 마찬가지로 은마에게 별 흥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여자 둘과 남자 하나는 산책과 점심 식사를 여유롭게 마치고 순조롭게 헤어졌다.
소연은 박하를 만나기 전, 절박한 상황을 맞닥뜨렸다. 30대 친목 모임에서 37세 남자가 댓바람부터 소연을 지목하더니, 추궁했다.
"소연, 넌 왜 모임 안 나와?"
"네? 아, 시간이 안 되네요."
소연은 당황했으나, 침착하게 대응했다.
"이 모임 들어온 지 일주일 넘었잖아. 활동 안 할 거면, 나가!"
"모임에 나가고는 싶은데, 아직 기회가 없었어요. 그런데, 너무 강압적인 느낌이 드네요."
남자는 어린 신입 여성 회원에게 모임에 참석할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단체 대화방에서 이들의 대화를 지켜보는 회원들은 있었으나, 아무도 개입하지 않았다.
'눈팅하는 사람들은 있는데, 아무도 안 나서네. 휴, 불쌍한 신입! 내가 나설 차례인가?'
보다 못한 박하가 대화에 참여했다.
"활동은 자율이에요. 모임 규정을 보면, 신입 회원이 언제까지 꼭 모임에 참석해야 한다는 기간 제한은 없어요."
박하는 궁지에 몰린 쥐를 구출한 구세주와도 같았다. 소연은 이때다 싶어, 박하에게 말을 건넸다.
"박하 언니, 오늘 시간 되시면 저랑 만나요!"
소연의 즉흥적인 제안에 다소 놀랐으나, 박하는 곧 소연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 이렇게 갑자기? 오호라, 이상한 놈을 피하기 위해 나를 선택했군! 아무렴, 여자들끼리 만나서 노는 게 부담 없고 마음 편하지. 차라리 그게 백 번 낫겠다.'
박하도 응수했다.
"마침 지인과 갈래길 걷기로 했는데, 소연 씨도 갈래요?"
"네, 좋아요. 갈게요!"
"그럼, 11시에 시청에서 만나서 차 한 대로 이동해요."
계획에 없던 만남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그녀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37세 남자가 엉뚱한 말을 했다.
"박하, 소연이 만나면 사진이랑 똑같은지 자세히 보고 나한테 꼭 알려줘!"
"왜요? 소연 씨한테 관심 있어요?"
"난 애인 있는 여자가 좋더라!"
"......"
박하는 허겁지겁 외출 채비를 하며, 은마에게 전화했다.
"여보세요? 32살 여자 한 명이 갑자기 같이 가기로 했어. 괜찮지?"
"어, 왜요?"
"아,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이따 만나서 얘기해! 오늘은 시청 주차장에서 보자."
은마는 시무룩했다.
'누나랑 단 둘이 가고픈데, 또 불청객이 끼네.'
박하는 소연과 은마를 만나기 위해 서둘러 시청으로 향했다. 박하는 사진 속 소연의 모습을 떠올리며, 내심 기대에 부풀었다.
'오래간만에 안구 정화 좀 하려나? 얼마나 예쁘려나! 아직 아무도 안 왔네.'
그녀는 비상등을 켠 채,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나!"
은마가 외치며 달려왔다.
"무슨 일 있어요?"
"어, 그게......"
박하는 그간 있었던 일들을 은마에게 빠르게 설명했다.
"애인 있는 여자가 좋다니, 그 새끼 변태 아니야? 그런 사이코는 걸러야 돼. 마주칠까 봐 두렵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어차피 술판이라 모임에 나갈 일은 없어. 방장 언니도 나더러 모임 좀 나오라고 잔소리하던데, 별로야. 술을 안 마시는데, 술자리 가면 술잔 앞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어색하게 앉아 있겠지."
"게다가, 술 한 방울 안 마셔도 회비는 내야 되잖아요. 돈이 아깝죠."
"회비가 아까워서, 안주를 꾸역꾸역 먹으면 뒤룩뒤룩 살만 찌는 거지. 심지어, 가슴보다 배가 더 나온다고. 정직한 내 몸뚱이."
"어, 혹시 저분 아니에요?"
은마가 가리키는 곳에는 여자 한 명이 어색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저기, 박하 언니세요?"
"네, 맞아요. 그럼, 소연 씨?"
그녀를 바라보는 박하의 눈은 왕방울 만해졌다.
'허허, 내 이럴 줄 알았어......'(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