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시간이 흘렀다. 이불속에서 박하와 마주 보고 있던 댕댕은 시계를 보더니, 펄쩍 뛰었다.
"헉!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아, 그냥 누나랑 이렇게 계속 누워 있고 싶은데...... 어휴."
"왜, 무슨 일 있어?"
영문을 모르는 박하가 댕댕에게 물었다.
"얌전 누나가 식사 모임 공지했어요. 오늘 저녁 8시요."
"가기 싫으면, 안 가면 되잖아!"
박하가 조언했다. 그러자, 댕댕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의리상 가봐야 돼요. 집에 들러서 옷 갈아입고, 이동하려면 빠듯하겠네요."
"지금 입은 옷도 깨끗한데, 그냥 곧장 가면 안 돼?"
"안 돼요. 하루 입은 옷은 다시 안 입는 게 철칙이에요."
"아이고, 빨래도 일인데...... 너, 우리 모임에서 가장 친한 여자가 누구야?"
"얌전 누나요."
댕댕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 그래서 얌전 언니가 주최한 자리는 네가 꼭 가야 한다는 거야?"
"아까 얌전 누나한테 전화 왔는데, 일부러 안 받았어요."
"친하다며, 왜 안 받았어?"
"여자 친구한테 집중하고 싶어서요!"
'바보! 그럼, 그냥 모임에 나가지 말라고!'
박하는 서운함이 울컥 밀려왔으나,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의리를 지키려는 댕댕의 모습을 보고, 그의 인맥을 존중해 주고자 노력했다. 한편으론, 자신이 다른 이성에 대해 질투하는 모습을 보이면 속좁아 보일까 봐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진짜 가기 싫은데, 간다고 약속했으니 가야죠."
"응, 알았어. 가서 재밌게 놀아."
댕댕은 떠났다. 박하도 좋은 낯으로 배웅했다. 사실, 그녀에게도 다른 이성으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물론, 남자 친구에게 내보이진 않았다.
"등산화 사러 갈래요? 이번 주 목요일."
흥마였다.
"골라 달라고?"
"그날 같이 시간 보내고 싶어요."
명백한 데이트 신청이었다.
'뭐야, 이 놈은......? 어딜 감히 들이대!'
박하에게 흥마는 전혀 매력적인 대상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그를 떨칠 핑계를 서둘러 고민했다.
'댕댕과 사귄다고 흥마에게 어서 말해야겠다!'
흥마가 박하에게 전화했으나, 그녀는 일부러 받지 않았다.
'아, 깜짝이야! 갑자기 왜 이리 적극적이람?'
그녀가 연락을 피하자, 흥마는 정중히 문자를 남겼다.
"혹시, 부담 느끼셨다면 죄송해요. 다른 의미는 없어요. 부담스러워하실까 봐 전화했어요."
'전화가 더 부담인데......'
박하는 그에게 등산 용품 매장을 방문해 직접 신어보고 등산화를 구매하라고 소개했다. 더불어, 흥마의 만남 요청은 완곡히 거부했다. 그녀는 확실히 그에게 무관심했기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날, 박하는 본가에 들러 부모와 식사했다. 그녀는 내내 댕댕의 안부가 궁금해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나, 그는 종일 연락이 뜸했다.
'자나? 낮에는 쳐 자고, 밤에는 이러(일어)난다더니 낮쳐밤이, 딱 그 꼴이구만......'
박하는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애인에게 전화했다. 뚜르르,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 댕댕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자고 있었어?"
"응......"
그는 목소리가 잠긴 상태였다. 잠결에 전화받은 티가 역력했다.
"연락이 안 돼서, 전화했어."
"연락? 답장했는데...... 후아암!"
수화기 너머로 늘어지게 하품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박하는 화가 부글부글 일었다. 답답한 심정을 못 이긴 그녀는 그만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대화가 전혀 안 이어지잖아!"
"누나, 화났어? 갑자기 왜 그래......"
"난 네 나이 때 그렇게 생활하지 않았어. 너 좀 한심해!"
"미안해......"
박하는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내가 이해심이 부족한 걸까? 아무리 일을 쉬고 있다지만, 이렇게 마냥 게을러도 되는 걸까?'
"누구랑 통화하니? 혹시, 남자 친구야? 남자 목소리던데."
박하의 어머니가 물었다.
"아, 아니에요."
박하는 손사래를 쳤다.
"너 좋다는 남자도 하나 없어?"
그녀의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
"나는 사위를 언제 볼 수 있으려나......?"
"그러게요. 외손주 보기는 글렀나......?"
부모의 한탄에 딸은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이었다.
"이만 가볼게요."
"그래, 조심히 가라."
"끼니 거르지 말고, 밥 잘 챙겨 먹어!"
박하는 부모에게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린 남자를 대뜸 애인이라고 소개하기엔 사귄 지 겨우 몇 시간이 흘렀고, 교제가 슬슬 후회되는 시점이었다. 그들의 불안한 관계는 기껏해야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었다.
'댕댕한테 나 왜 사귀자고 했지......? 그런 사람인지 몰랐으니 그랬겠지. 아, 잘 알지도 못하는데? 그럼, 단순히 외로움 때문이었나?'
그녀에게는 고민 상담이 필요했다. 불특정 다수의 조언이 필요했기에, 박하는 모임 단체 대화방에 질문했다.
"사귄 지 얼마 안 된 남자 친구가 있는데, 종일 잠만 자요......"
"사귄 지 얼마나 됐어요?"
"하루요......"
"누나 남자 친구 몇 살인데요?"
"님보다 어려요."
"대박!"
27세 남자와 24세 여자가 박하의 하소연을 들어주었다.
"그럼, 남자 친구는 26살?"
"나이는 비밀!"
"이 언니 능력자시네."
"박하 누나 남자 친구는 일 안 해요?"
"코로나 때문에 백수 됐어요......"
"아......"
"언니, 그냥 다른 남자 만나요. 잠만 자는 남자 친구는 버려요!"
"어휴, 속상해요."
'앓느니 죽지. 답은 이미 나왔는걸...... 내가 속이 좁은가? 야행성인 댕댕을 내가 이해해야 되는 건가?'
박하는 턱을 괴고 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였다.
"뭐 해?"
댕댕으로부터 온 문자였다.
'헉, 뭐라고 하지?'
그녀는 범죄의 현장을 들키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랐다. 거짓말하느니, 차라리 솔직해지기로 했다.
"네 험담해."
"알아. 사람들이랑 대화하는 거 다 봤어. 나를 아주 한심한 사람으로 만들었던데, 내가 뭐 그리 잘못했어? 여자 친구라는 사람이 그래도 돼?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 가네."
순간 박하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수습했다.
"미안해...... 너한테 상처 줄 마음은 없었어. 어차피, 내 남자 친구가 너인 건 아무도 모르잖아!"
"아무도 모른다고? 아니, 눈치챈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박하는 다급한 심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눈치챈 사람이 누군데?"
"눈치챈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지, 확실히 있다고는 안 했어."
댕댕의 태도는 냉정했다.
"내가 잘못했어. 화 풀어."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갖는 게 좋겠어."
"우리 내일 등산 가기로 했잖아. 난 네가 필요해."
"누나는 내 얼굴 볼 수 있겠어?"(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