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았다. 박하의 자취방에 햇살이 고요히 스며들었다. 그녀는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자, 옆에서 자고 있는 댕댕을 확인했다. 그는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어쩜, 잡티 하나 없네! 피부가 곱기도 하지.'
20대의 고운 피부를 감상하며, 박하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몇 시지?'
박하는 댕댕이 깰까 봐,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상시계는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제 늦게 잤는데도, 일찍 깼네...... 아, 피곤해.'
간밤에 그들은 많은 대화를 나눴다.
"옷, 다 벗어요?"
"어차피, 다 벗을 거잖아."
댕댕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일했다고 말했다. 군대도 가지 않은 채, 계속 돈만 벌었다고 했다.
"무슨 일 했어?"
"이것저것 했어요. 뭐든 기술을 배워야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요리도 배우고, 인테리어도 배웠어요."
"실업계였어?"
"네. 공부엔 별 뜻이 없거든요. 돈 버는 게 제일이죠."
"고생했네. 돈은 만족할 만큼 벌었어?"
"2천만 원 모았어요. 코로나라서, 일 안 하고 쉬려고요. 당분간은 괜찮아요."
자신 있게 금액을 공개한 댕댕의 자세에 박하는 내심 놀랐다.
'구체적인 수치를 물은 건 아니었는데, 자신 있나 보군. 겉보기완 달리 성실한 면도 있네.'
"좌우 시력이 짝짝이라서, 군 면제라고 했지? 시력이 몇인데?"
"좌 0.3, 우 1.5요."
"심각하네! 그럼, 너 저 글씨들 보여? 보이면, 읽어봐."
박하는 문에 붙은 지도를 가리키며 물었다. 깨알 같은 글씨들이 빼곡했으나, 그녀는 전혀 읽을 수 없었다.
"다 보여요. 금오산, 화왕산, 재약산, 가지산, 신불산......"
"우와! 코딱지 만한 저 글씨가 잘 보여? 너, 초능력자 같아!"
"네? 아니에요, 하하."
그에게는 부모와 형이 한 명 있는데, 연년생인 형과 별로 친하지 않다고 했다.
"한 살 터울이면, 완전 친구잖아! 형이랑 왜 안 친해?"
"제가 볼 땐, 형이 한심해요. 그런 거 있잖아요. 최상위권 성적도 아니고, 애매해서 이도저도 아닌 등급이요. 형이 딱 그런 부류예요. 형은 대기업 입사 준비 중이라는데, 제 생각엔 잘 안 될 것 같아요."
댕댕은 형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형과 왜 사이가 나쁜 건지, 박하는 더 묻고 싶었으나 댕댕의 표정을 보니 안쓰러웠다. 어느 가정이나 말하지 못할 속사정이 있는 법이었다. 초면에 너무 깊이 파고들지 않는 게 나을 듯싶었다.
"음, 내 생각엔 26살이면 아직 기회가 충분히 있을 것 같은데? 서른 살 전에는 형도 자리를 잡겠지!"
박하는 긍정적으로 말했다. 댕댕이 대뜸 질문했다.
"누나는, 월 수입이 얼마예요?"
"야! 나, 지금 코로나 때문에 일을 아예 못해서, 굶어 죽을 판이야. 그리고, 그런 거 묻는 건 실례 아니야?"
박하는 당황해서, 발끈했다. 떳떳하게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도 창피했지만, 댕댕이 재력을 따지나 싶어 적잖이 놀랐다. 그녀는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저기, 근데...... 우리, 계속 얘기만 해?"
박하는 수줍게 웃으며 댕댕의 안색을 살폈다.
"네?"
댕댕은 의아했다.
"나, 밤 10시 전후에 자는 사람이야."
"아, 잘 시간이 한참 지났네요. 새벽 1시가 넘었으니."
"먼저 씻고 와."
"아까 집에서 씻고 나왔어요."
"그래? 그럼 어서 누워."
"손, 발만 다시 씻을게요!"
댕댕은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을 느끼며, 후다닥 화장실로 들어갔다.
'올 것이 왔구나!'
박하는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네 시였다.
"너, 안 피곤해? 난 잘래. 졸려......"
"전 멀쩡해요. 잘 자요, 누나."
약 세 시간 후, 두 발로 선 박하는 기지개를 크게 켰다. 월요일이었다.
'으쌰, 오늘 하루도 시작해 볼까!'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어 세탁하고, 아침상을 차렸다. 댕댕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죽은 듯이 자네. 배 안 고픈가?'
시체처럼 곤히 잠든 댕댕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박하는 혼자 식사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빨래도 건조대에 널었다. 그런데도, 댕댕은 일어나지 않았다. 박하는 시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일어날 때도 되지 않았나? 도대체, 몇 시간을 자는 거람......? 남의 집에서 참 잘도 자는군. 누가 업어가도 모르겠어.'
박하는 댕댕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분명, 미남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그녀의 눈엔 댕댕이 귀엽게 비쳤다. 그는 상대적으로 박하보다 어리므로, 풋풋한 매력이 있었다. 박하는 댕댕에게 첫 상대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지난밤 대화를 떠올렸다.
"지금, 기분이 어때?"
"누나는요?"
"내가 먼저 물었잖아!"
"천국에 간 기분이요."
"뭐? 풉! 너, 천국 가봤어? 귀여워!"
박하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댕댕의 좌측 볼에 쪽, 가볍게 뽀뽀했다.
"누나도 어서 말해줘요!"
"음, 난 남자한테 지배받는 게 좋아."
"변태?!"
"뭐? 너, 이리 와!"
"악!"
그들은 이불속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장난쳤다. 꿈같은 첫날밤, 동화 같은 하룻밤이었다.
박하는 댕댕의 몸을 누르지 않도록 조심하며, 아까 자신이 누워있던 벽 쪽으로 도로 누웠다. 댕댕은 뒤척임조차 없었다. 박하는 스르륵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에라, 모르겠다. 한숨 더 자야지......'
그녀는 까맣게 몰랐다. 다음 날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 될 것이라는 걸(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