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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전

by 슈히

얌전은 온라인 게임 중이었다.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은 흐리멍덩했다.

'무슨 생각이 들겠어. 휴,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인간관계 다 부질없어. 큰 의미가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 그냥, 잊어......'

그녀의 나이는 30대 후반, 곧 마흔을 앞둔 혼돈의 시기였다. 얌전이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는 모니터에서 그녀의 과거가 재생됐다. 그녀가 30대 초반이었던 시절, 게임 동호회에서 그놈을 만났다.

"누나, 번호 알려줄래요?"

"뭐 하게?"

안주를 집어 먹던 얌전은 손에 포크를 든 채 경계심을 표현했다. 그녀가 쓴 동그란 안경알이 조명을 받아 반짝 빛났다. 상대는 얌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누나가 마음에 들어요!"

얌전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과일을 베어 문 입이 파르르 떨렸다. 달콤한 맛이 느껴졌다.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 그들은 장거리 연애를 했다. 얌전의 자취방에서 애인의 집까지 약 200km 이상의 거리였다. 남들이 들으면 혀를 끌끌 찰 노릇이었다.

"돈, 시간, 체력 모두 낭비했군. 몸 가까운 게 최고 아니야?"

문제점은 하나 더 있었다. 얌전의 애인은 그녀보다 무려 10살이나 연하였다.

"호호, 귀여워!"

"누나가 더!"

얌전은 장녀인데, 두 명의 동생들이 그녀보다 먼저 결혼해서 조카들을 낳았다. 아기가 생기니, 부모님의 얼굴에는 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우리 막둥이가 출산하느라 참 애썼다!"

"어쩜, 엄마를 쏙 빼닮았을까?"

"그런데, 우리 집 맏이는 대체 언제 시집가려나? 애는 어느 세월에 낳고?"

이제, 집안에서 미혼인 자녀는 얌전뿐이었다. 그녀의 혼사는 가족들의 걱정거리였다.

'아, 대체 다들 어디서, 어떻게 만나서 결혼을 하는 걸까?'

"언니, 남자 친구 있다고 하지 않았어?"

막내 동생이 물었다.

"어, 그게...... 헤어졌어."

얌전은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누나 없이 난 못 살아! 지금 어디야, 집이야? 지금 출발할게!"

얌전이 애인에게 이별을 처음 말했을 때, 어린 연인은 얌전을 붙잡고 늘어졌다.

"누나, 사랑해."

그는 수없이 사랑을 맹세했으나, 얌전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갔다.

'사랑이 밥 먹여 주나......? 이제, 현실을 마주할 때야.'

얌전은 애인을 부모에게 소개하기 위해 식사 자리를 마련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혼기가 꽉 찬 장녀를 가진 부모는 나이 어린 예비 사위를 못 미더워했다. 식사 자리에서 몇 마디 대화가 오갔으나,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다.

"자네, 올해 나이가 몇인가?"

"25세입니다. 장인어른!"

"김칫국 좀 마시지 마......"

"하하하하하!"

얌전이 곁에서 남자 친구의 팔뚝을 꼬집으며 눈치를 줬으나, 애인이 가진 것은 오직 패기뿐이었다.

"네가 자취를 해봤니, 살림을 해봤니, 그렇다고 번듯한 직장이 있길 하니......?"

"누나, 내가 잘할게!"

"이거, 놔. 그 말은 수십 번도 더 들었어!"

연애의 목적이 꼭 결혼은 아니었지만, 얌전은 이제 연애만 할 상대는 원치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미래를 함께 꿈꿀 수 있는 반려자였다.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을 잊고자, 얌전은 술 모임을 열었다. 소주 두어 잔을 급히 들이켰다.

"천천히 드세요!"

"누나, 괜찮아요?"

얌전은 흐느꼈다.

"몰라...... 나쁜 놈!"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정원은 안절부절못했다. 얌전은 주먹으로 탁자를 쾅, 세게 내리쳤다.

"하아, 세월이 아깝다......"

"전 남자 친구는 몇 살이에요?"

정원이 얌전에게 술을 따르며 물었다.

"올해 26살 됐겠네요......"

"우와!"

"세상에, 누나 능력자!"

"어리면 뭐해요. 가진 게 그저 젊음뿐인데."

얌전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놈은 젊으니, 곧 다른 여자 만나겠죠. 난, 이제 누구랑......"

그녀는 잠꼬대를 하며 스르륵 잠이 들었다. 그렇게 1차가 마무리됐다.

"얌전 누나가 술이 꽤 약하네. 겨우 소주 두 병째인데."

"지금 심정이 지옥이겠지."

"나도 전 여자 친구랑 깨지고 한동안 술독에 빠져 살았어."

"시간이 약이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정원이 얌전을 부축했다.

"누나, 저한테 기대세요!"

"으으음, 나쁜 자식...... 너어어!"

얌전은 비틀거리며 정원과 나란히 걸었다. 정원은 얌전과 함께 택시에 탔다.

"정원 형, 얌전 누나! 조심히 들어가요!"

남은 회원들 셋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동시에 의견을 교환했다.

"정원 형이 얌전 누나 데려다주는 거야?"

"그러게."

"저렇게 둘이 보내도 돼?"

"몰라, 알아서 하겠지."

"우린 눈치껏 빠지자."

"얌전 누나, 세상에 남자는 많아요. 파이팅!"

"우린 2차 가자. 헌팅 포차 어때?"

"콜!"

정원과 얌전을 태운 택시는 밤거리를 힘차게 달렸다.

"기사님, 한솔역 가주세요."

정원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얌전은 정원의 어깨에 기댄 채였다.

'오늘 술자리 나오길 참 잘했다!'

정원은 얌전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녀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얌전은 알지 못했다. 얌전은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는 중이었고, 정원은 지켜보고 있었다.

'누나는 알까? 애타는 이 내 마음을......'

그는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귀여워.'

택시에서 내린 얌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원에게 말했다.

"사실, 나 아까 술 다 깼어. 네가 내 머리카락 만졌지? 그때, 술기운이 확 달아나더라."

"그, 그건...... 얌전 누나, 조..... 좋아해요! 좀 뜬금없지만......"

"나를? 왜? 언제부터?"

"아......"

"정원이가 나랑 몇 살 차이지?"

"6살이요."

"어리네. 근데, 나 결혼 상대 만나야 돼. 결혼할 마음, 있어?"

"그, 그건!"

"이제 결혼할 사람이랑 사귈 거야! 그리고, 이제 연하는 싫어."

얌전의 태도는 비장했고, 정원은 당황스러웠다.

"하, 할게요! 결혼할 준비는 아직 덜 됐지만, 결혼할 마음은 있어요."

얌전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또 한 번 사랑을 믿어 보기로 했다.

'30대는 아무렴, 좀 다르겠지.'

하지만, 그녀의 연애로 인해 다른 회원들이 모임에서 쫓겨날 줄은 그땐 꿈에도 몰랐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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