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니와 초등, 중등,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우리 가족은 대방동에서 상도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어쩐 일인지 엄마는 언니와 나를 전학시키지 않고 다니던 학교까지 걸어서 다니도록 했다. 이사 전날 학교에서 새집까지 오가는 경로를 익히느라 직접 걸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의 양손을 언니와 내가 하나씩 잡고 여동생은 내 손을 잡았다.
“자, 이렇게 교문에서 나와서 왼쪽으로 꺾은 다음 일자로 쭉 걷는 거야.”
엄마가 말하면 언니가 똘망똘망한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걷는 동안 표지가 될 만한 것들, 우체통이나 상점의 입간판, 횡단보도 앞에 구령대처럼 만들어놓은 시멘트 구조물 같은 걸 찾아냈다.
“첫 번째 찻길을 건너면 오른쪽에 우체통이 있고, 선일라사, 효성스즈끼……. 너도 알았지?”
선일라사나 효성스즈끼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언니는 그 이름들을 열심히 외웠고 이따금 다짐받듯 고개를 빼 내게 물었다. 나는 자꾸 빠져나가려는 여동생의 손을 꽉 잡고 우리가 지나쳐온 그 시멘트 구조물의 용도가 무엇일까 생각하느라 응, 응 건성으로 대답했다.
엄마의 손목시계로 교문 앞에서 집 앞까지 시간을 재니 꼭 삼십 분이 걸렸다. 그 길을 언니가 졸업할 때까지 오 년간 수도 없이 함께 걸었다. 나보다 두 살 어린 여동생은 취학통지서를 받기 시작한 주소지가 달라서인지 우리 둘과 한 번도 학교가 겹친 적이 없었다. 나는 혼자 등하교하는 동생이 몹시 부러웠는데 실은 언니가 굉장한 예민쟁이였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이해 불가한 이유로 언니의 기분은 극과 극을 오갔다. 콧노래를 부르며 다정하게 굴다가도 어느새 당장 눈물을 툭 떨굴 듯 침울해졌다. 그러면 몇 발짝 앞서가는 언니의 도시락통을 들고 터벅터벅 뒤따라 걸었다. 불안정한 혈육의 기색을 살피느라 마음껏 공상에 빠져들지 못하는 것이 당시 내게 가장 큰 불만이자 미스터리였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저토록 슬프게 하는가, 언제까지 슬플 것인가, 그렇대도 지 물건은 지가 좀 들지…….’ 따위의 속엣말을 하다 보면 학교에 도착하거나, 친구들과 만나 저절로 기분이 풀어지거나 했다. 나는 그때를 기다려 언니에게 재빨리 도시락통을 건네주곤 했다.
조금 더 자라 중, 고등학생이 되자 언니의 한층 구체적이고 섬세한 감정들을 보게 되었다. 보게는 되었으나 무딘 내 감각으론 요동치는 그녀의 주파수를 도통 읽어낼 수가 없었다. 한번은 미술 시간에 친구들과 장난치다 주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쉬는 시간에 눈이 빨개진 언니가 교실로 찾아와 “너…왜 그랬어?” 하곤 말도 제대로 맺지 못하고 가버리는 게 아닌가. 전교 일 등과 회장을 밥 먹듯 하던 언니를 모르는 선생님이 없던 터라 미술 선생님이 언니에게까지 한마디 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눈에 띄는 학생이라는 이유로 더 호된 말을 들었는지도 모른다. 미안함이 잠시 스쳤다. 그래도 그렇지. 나는 나고 언니는 언닌데 울 것까지야. 결국 그날 언니의 눈물 역시 미스터리로 남고 말았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자매라는 끈으로 묶여 지냈다. 그러는 동안 불필요한 관심은 줄이고 유쾌한 농담과 주책으로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기술이 늘어갔다.
나는 그런 관계가 편했는데 언니도 그랬을까 돌아보게 된 건 최근이다. 내가 독립하고 언니와 셋째도 제각기 삶의 변화를 겪으며 우리 세 자매는 전에 없이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그래서인지 속내가 담긴 말이 느닷없이 튀어나오곤 했다. 그렇다고 대뜸 심각해지는 건 아니고 웃음 끝에 새 나오는 한숨처럼 자연스럽게 대화에 섞였다 사라지는 식이었다. 그날도 다이어트와 식사에 관해 한참 떠들던 중이었다.
“나는 이렇게 그릇이 큰데 한 번도 양껏 채우질 못 해봤네.”
셋째가 만들어온 바삭한 감자전을 젓가락으로 가르며 언니가 말했다. 얼굴엔 미처 웃음이 가시지 않은 눈과 입 모양을 따라 옅은 그늘이 져 있었다.
실제로도 뱃구레가 컸던 언니는 아기 때 연년생으로 태어난 나 때문에 젖이 부족해 자주 울었다고 한다. 자연히 엄마 손을 자주 탈 수밖에 없었다. 몸과 마음이 불안했던 젊은 엄마는 우는 아기를 심장 가까이 안고 달래다가, 한탄과 넋두리를 늘어놓다가, 한두 마디쯤은 저주와 같은 말을 내뱉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러니 영양가 있는 젖 대신 그런 것을 받아먹게 한 엄마를 원망할 수는 없다. 다만 타고난 그릇이 커서 무엇이든 담게 되는 사람이 있다고, 그게 언니라고 생각해 본다.
이미 오래전부터 나는 그걸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언니가 신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남의 감정에 마음 쓰고 품으려 애쓰느냐고, 그보다 자기 앞가림이 먼저라고 입바른 소리를 하면서도 정작 기댈 데가 없으면 언니를 먼저 떠올렸기 때문이다. 만약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거나 울고, 욕하고, 지랄발광을 해도 안전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미안하게도 역시 그녀를 찾게 될 것이다.
적은 양의 마음에도 왈칵 넘쳐버리는 나와 달리 언니는 끝없이 담는다.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게 더 많이 담긴다. 누구나 좋은 건 자기가 갖고 나쁜 것, 힘든 건 남에게 줘버리고 싶어 하니까 말이다. 언니의 예민함과 눈물은 끝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앓는 몸살 같은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그만하라고 말리고 싶지만 소용없다는 걸 안다. 누군가에겐 그녀의 큰 그릇이 간절하다는 것도.
그 놀라운 그릇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하나의 미스터리가 풀리니 또 하나의 미스터리가 생겨났다. 어느새 나는 어릴 적 횡단보도 옆 시멘트 구조물의 용도를 추리하듯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언니가 찢어주는 감자전을 물리치며 웅얼거렸다.
“나 배불러, 언니 먹어.”
“그래, 나 이거 좋아해.”
언제나처럼 불쑥 튀어나온 진심은 곧 심상한 대화로 덮였다. 그러나 그녀의 커다란 그릇이 갓 구운 셋째의 감자전처럼 좋은 것, 영양가 있는 것으로 양껏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은 미스터리가 풀릴 때까지 함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