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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찬란 Jan 31. 2024

우리는 야투비 자매





명절 때였나 가족 모임 때였나 온 가족이 모여 먹고 마시는 중이었다. 우리 집은 식구가 많다. 딸 셋에 아들 하나가 제각기 딸린 식구를 이끌고 부모님 집에 모이면 식탁에 한번에 앉을 수 없을 정도다. 보통은 거실에 커다란 상 두 개를 붙이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야외용 돗자리를 넓게 깔고 아예 바닥에 둘러앉는다. 그날은 돗자리였다. 음식과 술을 늘어놓고 왁자지껄 먹다가 언니가 불쑥 “야투비~야투비~우리는 야투비 자매~” 로 시작하는 노래를 불렀다. 맞은편에 앉아 고기를 굽던 나와 소주를 입에 털어 넣던 여동생의 눈이 마주쳤다. 아니 이건! 그러고나선 셋의 합창이 시작되었다. “언제나 일심동체, 일심동체 야투비!!!” 마지막 야투비는 꽤 우렁찼다. 순간 귀신이라도 지나간 듯 거실이 조용해졌다. 가족들은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특히 우리의 자녀들은 이 맥락도 정체도 모를 유치한 노래에 경악하는 표정이었다. 정작 노래를 부른 당사자들은 말없이 입을 실룩대다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그제야 “뭐야, 뭔데?” 하는 질문이 터져 나왔다. 이건 언니와 나, 여동생만 아는 노래다. 우리가 국민학교 저학년 때 만들었으니 거의 사십 년에 육박하는 역사를 가진 이름하여 자매송. 어른이 되면서 기억 저편으로 까마득히 가라앉았던 노래를 언니가 끄집어 올린 것이었다.     


어릴 적 우리는 늘 함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부모님이 부재중인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열여섯에 맨몸으로 상경한 아빠는 작은아버지에게 기술을 배워 샷시 가게를 차렸고 70~80년대 건축붐 덕에 일이 몰릴 때면 밤새워 작업을 했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돕기 위해 가게를 지켰다. 이제와서는 딸이 셋이나 되는데 사람을 쓰지 않고 굳이 아빠 일을 도왔어야 했느냐는 원망을 종종 하지만 그때만 해도 우린 우리가 놓인 상황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어린이였다. 어른이 없는 아이의 생활은 자유로웠지만 갑작스러운 위험이나 돌발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동반했다. 예를 들면 집에 갑자기 낯선 사람이 찾아 온다거나, 전기가 나간다거나, 방문이 잠겨 열리지 않는다거나 하는 일들. 그런 사소한 일들은 의식하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도둑이 들거나, 불이 나거나, 귀신이 나타나 우리 셋을 한 번에 집어삼키는 무시무시한 상상으로 번지곤 했다. 셋이라도 당해낼 수 없는 두려움은 많고 많아 우리의 하루는 대부분 엄마의 귀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일로 채워졌다. 기다릴수록 더디게 가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우리는 온갖 짓을 하며 놀았다. 열두 자짜리 장롱문을 활짝 열어 놓고 숨바꼭질을 하거나, 서랍장을 계단처럼 빼서 밟고 올라가 뛰어내리기도 하고, 부엌이 있는 시멘트 마당 한쪽에서 불장난을 했다. 세 명의 두려움을 합친 만큼, 아니 그보다 더 극성스럽고 수습 불가한 장난질을 일삼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 질서는 있어 언니의 지휘 아래 엉터리로 집 청소를 하거나 부모님의 생일상을 차려 서프라이즈를 하기도 했다. 우리의 자매송은 그러던 날 중 하루에 만들어졌다.   

   

빨래 더미를 뒤져 아무 옷이나 꺼내 입고 전신 거울 앞에 서서 패션쇼를 하며 놀던 날이었다. 쇼에 음악이 빠질 수 없었고 라디오의 신나는 음악에 맞춰 질리도록 워킹을 하고 난 끝에 우리만의 노래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안 그래도 청소가 잘 안돼 먼지가 굴러다니는 방바닥에 옷가지와 빗, 장신구들을 늘어놓고 앉아 각자 자신을 표현할 낱말 하나씩을 생각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야, 투, 비. 함께 놀다가도 엄마 대신 동생들에게 숙제해라 정리해라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하느라 야! 하고 소리치는 일이 많은 언니가 야, 언니도 동생도 관심 없고 무미건조한 둘째는 투(two), 개구지기로는 동네 남자아이들 저리가라인 막내는 역시나 자기 얼굴에서 제일 재미있게 생긴 코를 찾아내 비(鼻)라고 지었다 – 당시에는 1학년부터 교내 경시대회를 실시할 정도로 한자 교육이 활발해서 사용이 자연스러웠다. 즉석에서 가사와 음이 만들어지고 우리는 큰일이라도 해낸 듯 의기양양하게 놀이를 이어갔다. 

그 후로 아마 사춘기가 되기 전까지는 자매송을 종종 불렀던 것 같다. 대게는 엄마에게 혼날 일을 저질렀거나 저지르려고 할 때, 혹은 저지르는 중이었다는 게 함정이지만 그 밖에도 자매의 단합이 필요한 순간에 속살거리듯 한 명이 선창하면 키득거리며 나머지가 따라 불렀다. 그러면 만사 오케이였다. 무슨 일이든 자매송은 우리를 하나로 뭉치게 했다. 덕분에 우리 세 자매는 얌전히 흩어져 있다가도 한데 엉켜 놀고, 싸우고, 혼나고 울다가도 웃기를 반복했다. 마치 빗자루로 싹 쓸어내도 어느 틈에 나타나 보란듯 방바닥을 굴러다니는 먼지 뭉치처럼 말이다.     


한동안 잊고 지낸 노래를 언니가 불렀을 때 우습게도 나는 뭉클하면서도 약간 비장한 마음이 들었다. 아! 드디어 우리가 뭉칠 때가 된 건가. 유치한 노랫말만큼이나 오글거리는 그 기분이 왜 이렇게 반가운 걸까. 어느덧 중년에 이르렀지만 노래 속 야투비는 여전히 야투비인 채 그 시절의 캐릭터를 고스란히 유지하는 중이었다. 다만 변한 게 있다면 좀 더 지치고 기운 없고, 쉽게 체념하게 되었다는 것 뿐.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야투비의 극성스럽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필요한 때다. 역시 우리의 리더인 언니가 야! 하고 우리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라 자매여, 우리는 야투비 자매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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