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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찬란 Feb 14. 2024

이제 그만 하려고





“이제 그만하려고 해.”

언니가 말했다. 전날 부모님 집에 모여 거하게 한잔하고 느지막이 일어난 아침이었다. 우리는 테라스에 마주 서서 커피를 마시며 선뜩한 바람에 숙취를 떨치는 중이었다. 나는 부은 눈을 끔벅거리며 마찬가지로 푸석한 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컵에서 올라온 뜨거운 김이 아지랑이처럼 오롯이 솟아 잠시 시야를 가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동안 나 정말 치열하게 신앙생활을 했거든. 그런데 진짜 믿음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

분명 내 언니가 맞지만 낯선 기분이었다. 신앙인이 아닌 언니를 상상해 본 적이 없기도 했지만 그보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언니는 늘 참는 사람, 무엇이든 안으로 삭이고 상대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이건 싫어, 저건 마음에 안 들어, 하고 말을 잘라버리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학창 시절 내내 일등을 놓치지 않아 선생님들의 주목을 받던 언니였다. 초, 중, 고를 같이 다닌 탓에 새 학기가 되면 들어오는 선생님마다 이 반에 ㅇㅇ이 동생 있다며, 누구야? 하는 달갑지 않은 인사를 받게 만들던 언니캐릭터에 어울리지 않게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었다. 분명하게 결론 내리는 법 없이 말끝이 흐렸고 자기의 속내를 시원스레 밝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타고난 예민함을 숨기지는 못해서 언제인지 모를 순간에 이미 상처받은 표정이 되어 있기도 했다. 자라는 동안 그런 언니가 답답하고 한편으로는 어려웠다. 혹시라도 나의 날카로움이 언니를 찌를까 걱정되었다. 우리의 대화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겉돌기 일쑤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의 언니는 달랐다. 오랫동안 지켜왔던 신앙을 그만하기로 했다는 말을 분명하고 또렷하게 하고 있었다. 왜, 라고 물을 필요를 느끼지 못할 만큼의 선명함이 느껴졌다.      


아주 오래전, 언니도 나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여동생은 겨우 서너 살이던 때가 생각났다. 젊고 바쁜 부모는 무시로 세 딸을 집에 둔 채 밖에서 자정을 넘기곤 했다. 잘 시간이 되어 서럽게 엄마를 찾는 여동생의 울음이 시작되면 언니는 벽 앞에 꿇어앉았다. 벽에는 절에 다니던 엄마가 걸어둔 달력이 있었다. 달력 속 불상을 향해 “부처님, 제발 엄마 아빠가 빨리 들어오게 해주세요.” 하고 빌던 옆얼굴에 서린 두려움과 간절함에 덩달아 겁이 나던 밤들. 나에게 대신 빌고 있으라고 시키고는 우는 동생을 어른처럼 꾸짖다가 안아 달래다가 툭, 땀같은 눈물을 떨어트리던 어린 엄마는 결국 참고 견디는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신앙은 드러내지 못해 안으로 곪는 상처를 더욱 잘 외면하게 도와주는 진통제였을까. 그렇게까지 할 건 없는데. 차라리 같이 다리 뻗치고 앉아 울어버리지…….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니가 하라는 대로 앉아 기도하는 대신 끌어안고 같이 울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언니가 조곤조곤 하는 말을 귀담아 들었다.

“누구 못지않게 기도도 열심히 하고 예배도 열심히 고, 일도 가정생활도 죽자사자 열심히 했는데 그냥 열심히만 했더라고. 아무리 찾아봐도 그 안에 내가 없어. 아마 내가 나를 볼 용기가 없었나 봐. 그래서 이제라도 만나려고, 나를.”

얼마 전 가족심리상담 전공으로 진학한 대학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언니는 공부하는 동안 공부만 한 게 아니라 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좋은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나 어린 시절 꽁꽁 숨겨두기만 하고 하지 못했던 말을 해보았다고 한다. 뻑뻑한 눈을 비벼가며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어 마셔가며 나는 언니의 얼굴을 낯선 사람처럼 자꾸만 보았다. 언니는 원래 이런 사람이구나, 이렇게 총명하고 말이 많은 사람이었구나. 흐릿한 김처럼 가물거리던 생각과 관계의 입자들이 한데 모여 비로소 제대로 된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것 같았다.

“잘 됐다. 진짜 잘 됐어, 언니.”

나는 이제야 진짜 언니를 찾은 것 같은 기분에 조금 울컥했다. 그 마음에 답하듯 어느새 높아진 태양을 머리에 인 언니가 활짝 웃었다.

“어우, 내 동생 얼굴 너무 만신창인데. 혹시 나도야?”

“못지 않지, 굉장히.”

찐자매라면 역시 마무리는 감성파괴가 제맛인 건가. 우리는 닭살 돋는 대화를 마치고 낄낄대며 남은 커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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