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앞둔 남동생과 피부마사지 예약 일정을 조율하며 카톡방에서 나눈 대화이다. 우리의 대화는 이렇게 늘 극단으로 치닫는다. 시집살이 시킬까 봐 콱 죽어야겠다니. 만약 셋째 누나가 이혼과 이사와 회사 일과 개업 준비로 바쁘지 않았다면 대화는 대결 구도를 이루며 한층 매콤해졌을 테다.
정 많고 말 많고 화도 많은 누나들과 부대끼며 30년을 살아온 남동생은 이제 능구렁이가 다 됐다. 하지만 사춘기와 이십 대까지만 해도 딸 많은 집의 장손이라는 부담이 있었을 게 틀림없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의 가족구성을 들은 주변인들은 나이 많은 시누이 셋이면 시어머니가 세 명 더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며 그 집 남동생 장가가기 힘들겠다고 혀를 찼다. 나 역시 그 말에 반박할 자신은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태어난 남동생은 내가 스무 살 일때 어린이집에 들어갔고, 결혼할 무렵에는 초등학생이었으니 거의 아들뻘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누가 알까. 그럴 마음은 없지만 막상 아들같은 남동생을 장가보내려면 심술이 날지도.
실제로 우리 세 자매는 남동생을 아들처럼 돌보았다. 중년에 이른 부모님이 한창 이런저런 모임에 바쁜 탓이었다. 할 일이 많다고 투덜댔지만 고물대는 작은 생명체가 말 할 수 없이 예쁘기도 했다.
인원이 많으니 돌봄도 나름 체계적이었다. 첫째 누나는 영화, 음악, 공연 등 문화생활 및 고민 상담, 둘째인 나는 읽기와 말하기, 독서와 무한 사랑, 셋째는 놀이와 음식, 재우기와 싸움을 담당했다. 특히 셋째는 “내가 막내였는데 저 녀석이 태어나 자리를 뺏겼다.” 고 텃세를 부리며 간간이 치열한 남매 싸움의 경험을 제공했다. 이 정도면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성장환경 아닌가.
그럼에도 우리는 늘 남동생에게 옅은 미안함을 품고 있다. (어쩌면 셋째는 아닐 수도^^) 딸만 있는 집안의 늦둥이 아들로 귀하게 자랐으니 저밖에 모를 것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남동생은 칠 남매 중 장남인 아빠의 아들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장손 노릇을 하느라 명절이나 집안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했고 유독 아들에 집착하던 엄마에게 아들이자 때론 남편 대신의 역할을 해야 했다. 엄마가 셋째를 낳던 날, 또 딸인 걸 알고 미역국도 안 먹고 펑펑 울자 아빠가 시내에 나가 엄마와 외할머니 시계를 사서 선물했다거나 내가 아들로 바뀌는 꿈을 꾼 엄마가 자고 있던 내 팬티 안을 더듬어 봤다는 등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구구단처럼 외고 있는 이야기이다.
아빠가 늦게 들어와도, 부부싸움을 해도 원인을 자신의 아들 없음으로 귀결시키던 엄마의 삶은 남동생 이전과 이후로 뚜렷하게 나뉘었다. “니네 셋 다 합쳐봐야 내 아들 하나만 못하다.” 며 세상을 다 가진 듯 뿌듯해하던 엄마의 남아선호 사상에 우리 세 자매가 내내 결핍을 느꼈다면 남동생은 반대로 애정 과잉의 추를 매달고 산 셈이었다. 그런 동생의 혼삿길을, 아니 연애길을 막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암, 그렇고말고.
“동생아, 너한테 누나들은 없는 사람이다. 알지? 혹~시 여친이 누나 있냐고 물으면 없다 그래, 외동이라고. 알았지? 들키면 다 외국 가서 평생 만날 일 없다 그러던가, 죽었다 그러던가ㅋㅋㅋ”
우리는 남동생이 여자친구를 사귈 나이가 되면서부터 장난처럼 그런 말을 했다. 장난이었지만 진심이 깔린 말이었다.
다행히 몇 번의 연애 끝에 동생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짝을 찾았다. 누나가 셋이나 되는 걸 알고도 끄떡없는, 오히려 시시때때로 세 누나를 알뜰살뜰 챙기며 여지없이 극단으로 치닫는 주책마저 웃으며 받아내는 초사이언에 버금가는 정신력을 지닌 짝이다. 그걸 알기에 우리는 예비 올케를 보면 고마움을 담아 “미안해요.”를 먼저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