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찬란 Mar 06. 2024

언니, 넌 도움이 안 된다




이혼 절차를 밟는 여동생에게서 자주 연락이 왔다. 재산분할은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 부부가 합의를 못하면 어떤 기준으로 나누는지, 아이에 대한 친권은 누가 우선인지 같은 걸 묻기 위해서다. 대게 나는 대답을 제대로 못하고 “어...어떻게 했더라, 글쎄…….” 하고 버벅댄다. 내 경우 아이는 성인이 되어 양육권 다툼이 필요 없었고, 재산도 워낙 가진 게 없다 보니 전남편이 독립해 나가는 내게 얼마를 나눠주는 것으로 마무리 했다. 크게 싸울 일도 마음 상할 일도 없이 이혼해서였을까 물으면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불과 몇 년 전에 거쳐온 과정인데 그렇게나 까맣게 잊을 수 있을까 나조차 의아할 정도였다.

     

한번은 동생이 이혼신고를 하면 며칠 만에 확정이 되는지 물었다. 직장과 가까운 마포에 작은 집을 하나 사려는데 대출을 받으려면 등본에서 남편 이름이 빠져야 한다고 했다. 계약 날짜에 여유가 없어 하루 이틀 차이가 큰 문제라고 언니는 얼마나 걸렸냐고 하는데 역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답답하게 구는 내게 동생이 “언니, 넌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 하고 퉁을 줬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아 미안해졌다. 나는 휴대폰의 스케줄러와 사진첩을 뒤져 힌참만에야 겨우겨우 답을 찾아냈다.

“딱 일주일 걸렸네.”

동생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정말로 도움이 안 되는 순간이었다. 요즘 들어 그런 순간이 많아졌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순간이 많아졌다기보다 미안한 순간이 많아졌다. 도움이 안 되는 게 미안한 순간 말이다. 예전 같으면 미안하긴커녕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지 뭘 시시콜콜 묻나 했을 것이다.


어려서는 그보다 더 까칠해서 동생이 숙제를 가르쳐 달라거나 준비물 챙기는 걸 도와달라거나 놀아달라고 매달리면 화를 내고 모른 척했다. 동생은 칭얼대고 나는 무시하고, 언니가 엄마를 대신해 훈계하면 나는 “언니가 뭔데 이래라저래야!” 하고 대들었다. 지금 생각하니 참 못돼먹은 어린이였다. 어린이뿐 아니라 청소년, 어른이기도 했다. 도움은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기, 요청하지 않은 조언은 무시하기, 누구라도 내 영역을 침범하면 참지 않기. 일부러 그래야겠다고 마음먹진 않았지만 왠지 점점 더 그런 사람이 되어갔고 이상하지 않았다. 누구도 나에게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혼자서 충분히 잘 해내고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살다가 내가 실수에 허점 투성이 인간이라는 걸 알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가까이는 오늘 아침.      

커피를 마시기 위해 캡슐 머신을 작동시키다 테이블이 물바다가 됐다. 평소처럼 추출 버튼을 눌렀을 뿐인데 커피가 내려옴과 동시에 기계 바닥에서 물이 새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물은 원목으로 된 찻잔 보관함과 트레이를 적시고 테이블 아래 멀티탭 근처로 뚝뚝 떨어졌다. 당황스러웠다. 급한 마음에 손으로 막아보려다 뜨거운 물에 데이고 나서야 싱크대로 달려가 행주를 가지고 왔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된 후였다. 욕실에서 수건을 한 장 더 꺼내와 곳곳에 스며든 물을 닦았다. 그러는 동안 머리카락이 곤두설 정도로 신경질이 나 혼자 중얼중얼 욕을 하다 픽 웃고 말았다.

동생이나 언니가 이 꼴을 봤으면 어쨌을까? 분명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 나보다 먼저 행주를 들고 뛰어왔을 테고 나는 “됐어, 나 혼자 할 수 있어.”하고 행주를 홱 뺏었겠지. 물론 중얼중얼 욕도 하지 않았을 거다. 그랬다면 언니는 나를 위로하려 할 테고, 동생은 꼴 좋다며 놀려먹을 테니까. 그러면 좀 어때서. 언니에게는 힘들다고 징징대고 동생의 놀리는 고 주둥이야 꽉 꼬집어 버리면 될걸. 그런 것조차 못하고 혼자 꽁하며 살아온 나는 참 나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었나 보다. 그래서 동생의 말이 뼈를 때린다. 아프지는 않고 미안하다. 그렇다고 많이 미안한 건 또 아니고. 수시로 감정이 넘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나도 힘들었다고 뭐. 내가 괜히 못돼졌겠어!! 라고 애써 큰소리 쳐보며 더는 미안해지지 않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조금씩 보여주기로 한다. “어쩌겠어, 내 그릇이 간장 종지 만한 걸. 그래도 혹시 도울 거 있음 말해 봐. 언니잖아.”     

이전 05화 아들에게 누나들은 없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