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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찬란 Mar 13. 2024

여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몇 시인지 모를 캄캄한 밤중이었다. 꿈도 꾸지 않은 채 깊은 잠에 빠져있던 나는 아랫도리에서 무언가 터지는 느낌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할 겨를 없이 화장실로 뛰어갔다. 변기에 앉음과 동시에 무의식의 세계에 막 현실로 넘어온 정신이 상황 파악을 시작했다. ‘설마, 이런다고? 나이가 몇 살인데?’ 황당하고 기가 찬 심정으로 뒤처리를 하고 침대로 돌아와 젖은 커버를 훌렁 벗겨 세탁기에 넣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이부자리는 다시 뽀송해졌다. 그러나 심란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독립하기 전 그러니까 몇 년 전만 해도 옆자리에 누군가 함께 자고 있었을 텐데……. 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 수치심을 잠재울 타당한 이유 없이는 다시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말똥한 눈으로 천장을 보며 추리를 시작했다.      


자기 직전에 물을 많이 마시긴 했다. 저녁에 절친 똑똑이가 찾아와 조개구이를 먹었기 때문이다. 껍질이 딱딱한 해산물을 좋아하는 데다 마침 무한리필이었다. 혼자 사는 사람이 또 언제 와서 먹겠나 싶어 욕심껏 먹다 배가 터질 듯 부르고 입이 짤 정도가 돼서야 식사를 마쳤다. 참! 커피도 마셨지. 소화나 시키자며 걷다가 짠기를 걷어내려 스타벅스에서 톨사이즈 커피를 한 잔씩 마셨다. 그래도 그렇지. 자다가 신호가 오면 자연스럽게 깨는 게 보통인데 이번엔 몸이 먼저 제 할 일을 시작하고 나서야 뒤늦게 신호를 보낸 것이다.

술 때문인가? 그러기엔 두 명이 겨우 소주 한 병을 먹었을 뿐 말짱한 정신으로 잠들었다. 어쩌면 난생처음 해보는 운동 때문에 피곤했는지도 모른다. 두 번째 코로나를 앓으며 더는 젊은 기운으로 병마를 이겨낼 수 없게 됐음을 실감한 나는 생존 운동으로 코어 근육을 단련해 준다는 필라테스를 시작했고, 그제 두 번째 수업 후 근육통으로 하루를 꼬박 몸져누워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지. 사실 작년 연말부터 딸아이 입시에, 첫 책 출간에, 근무지 이동, 가족 여행, 그리고 새로 시작한 연재와 소설 공모전까지 쉼 없는 일정을 소화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봐도 속 시원한 답이 되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 출산 이후부터 시작돼 사십 대에 접어들며 확연한 존재감으로 나를 위협하던 그놈, 요실금. 음흉하게 기회를 엿보다 저항할 수 없는 타이밍을 찾아내 기어코 빅엿을 날리고 만 것이다. 피로와 체력저하, 요실금의 합동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몸뚱이는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작년 추석에 그놈은 언니에게 먼저 마수를 뻗쳤다. 명절 음식으로 더부룩한 속을 꺼트릴 겸 커피도 마실 겸 우리는 산책을 나섰다. 동네를 한 바퀴 크게 돌고 공원 정자에 앉아 깔깔대며 한참 수다를 떨었다. 그러는 동안 화장실도 두 번이나 다녀왔다. 중년이 된 여자는 화장실 출입을 게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는 상황, 예를 들어 갑자기 웃음이 터지거나 재채기를 하는 순간이면 본능적으로 괜찮아? 하는 눈빛으로 서로를 점검하는 것도 일상이다. 다행히 무탈하게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여전히 재잘재잘 시시껄렁하고 우스운 이야기를 쏟아내며 걷다가 언니가 다리를 꼬았다.

“야, 웃기지 마. 나 위기야.”

그러나 대화는 이미 속도가 붙어 있었고 나는 근심 반 장난 반으로 한 마디를 흘렸다.

“아우 진짜, 이럴 때 코르크 마개 같은 걸로 딱 틀어막을 수 있으면 을마나 좋아.”

그 말에 언니의 집중력이 흩어지고 말았다.

“야아아아~~~너 정말!”

망연자실한 표정의 언니가 마지막 절규와 함께 멈춰 섰다. 바로 집 앞이었다. 우리는 끼득대는 웃음을 멈추지 못한 채 울상을 지으며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한바탕 난리 부르스를 치르고 나오자 여유로운 표정으로 티브이를 보던 여동생이 혀를 차며 말했다. 세 자매 중 나이는 가장 어리지만 덩치 좋은 남매를 낳아 기른 고수였다.

“내가 왜 어두운색 롱치마만 입는 줄 알아? 제일 티 안 나고 깔끔하거든. 참고해 언니들.”

“셋째 너는 천재다, 천재. 명심할게.”

역시 경력자의 포스는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다. 언니와 나는 손을 꼭 붙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보니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우리 왜 이러고 살아야 되냐, 겨우 사십댄데.”

“그러게말야.”

“아직 할 일이 많다구. 나는 애들도 어리고오오.”

“나도야. 이제 막 독립했는데. 그동안 못한 거 다 해야되는데에에.”

그 와중에 셋째는 통달한 표정으로 엄마에게 안주를 요청하고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왔다.    

  

그래, 결국 우리는 이렇게 나이 들어가는구나. 느닷없는 사고에 황망해진 밤, 침대에 누워 나는 나와 내 자매들의 ‘노화’를 생각했다. 머리끄댕이를 쥐어뜯고 싸우던 어린 여자아이들은 이제 서서히 늙어간다. 별일이 없다면 함께 백발이 되고, 관절염을 앓으며, 서로의 얼굴에 핀 저승꽃을 세어주는 할머니가 되어갈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동안 숱한 좌절만을 맛보며 살아온 우리 아니던가. 이제 겨우 제대로 된 생의 궤도로 진입했는데 조금 더 힘을 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자매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뿐만이 아니라고 나는 때아닌 결의를 다졌다. 야투비 자매, 알았지? 아직 아니야. 정신 바짝 차리자고! 아자아자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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