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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섭 Jun 17. 2019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입니다

글쓰기에도 칭찬이 필요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인문대에는 꼭 학과마다 한분씩 괴짜 노교수님이 계시다. 이런 분들은 대개 ‘교수님의 교수님’이셨던 경우가 많아서 학과의 세세한 수업 규칙 따위는 쿨하게 무시하시곤 한다. 우리 과의 대표 노교수님도 이런 자유분방함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분이셨다. 예를 들어 아침 문자로 "날씨가 좋으니 휴강"이라 보내시거나, 수업 대신 갑자기 시낭송을 하는 식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이만한 무소불위가 없었던 셈인데, 캠퍼스 특유의 묘한 낭만과 맞물려 모두 그분만은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었다.

학기가 끝날 즈음이었다. 하루는 수업을 마칠 시간이 되었는데 교수님께서 칠판에다 큼지막하게 ‘시’라고 쓰셨다. 맨 뒷자리에 앉아서 딴짓을 하고 있던 나는 이번엔 또 무슨 돌발 행동이 나올까 싶어, 눈을 끔뻑끔뻑거리며 교수님의 새하얀 눈썹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대뜸 교수님이 입을 여셨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시다운 시’란 무엇인지 쓰고 모레까지 이메일로 제출하세요. 분량은 자유’ 교수님은 특유의 절제된 몸짓으로 분필을 내팽개치시곤 앞문으로 유유히 빠져나가셨다.

그날 밤 학과 도서관에 앉아 키보드로 톡톡 과제를 썼다. 처음에는 궁시렁거리며 펼친 노트북이었는데, 막상 빈 화면을 채우다 보니 ‘내 평생 앞으로 ‘시다운 시’가 뭔지 고민해볼 기회가 딱 한 번이라도 더 있을까’싶어 나름대로 열심히 글을 썼다. 그때 내가 썼던 첫 번째 문장이 이랬다. '시에는 독자가 거닐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지금 와서 다시 읽어보면 온통 개똥철학일 뿐인데, 당시에는 꽤 그럴싸한 비평문이 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뿌듯한 마음이 되어 이메일을 전송했다.

다음번 수업을 시작할 때였다. 교수님이 강의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시더니, ‘김광섭 학생 어딨나?’하고 나를 찾으셨다. 대개 졸업이 코앞인 고학번들은 맨 뒷자리에서 딴짓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교수님이 자기 이름을 부르면 잘못한 것이 없어도 무조건 화들짝 놀라게 마련이다. ‘네 여기 있는데요!’하고 토끼눈을 뜨자 교수님은 ‘자네 이번 과제 소리 내서 한번 읽어보게’하고 시키셨다. 이게 대체 무슨 경우인가 싶어 동공이 좌우로 크게 흔들리는데, 일단 종이에 시선을 부여잡고 짤막한 과제를 줄줄 읽어 내려갔다.


강의실 맨 뒷자리


글을 다 읽은 뒤, 암행어사의 평결을 기다리는 탐관오리처럼 교수님의 눈치를 살폈다. 교수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더니, ‘자네 글 참 재밌게 쓰는구만’이라고 칭찬해주셨다. 그리고는 한 5분에 걸쳐 어떤 문장이 좋았고, 어떤 아이디어가 신선했다는 식으로 반 친구들 앞에서 공개 비평을 남겨주셨다. 나는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는데 얼굴이 시뻘게져서 ‘네네’ 거리다 수업을 마치고 도망 나갔다. 영문과에서 4년을 지내는 동안, 다른 사람의 글을 보며 감탄한 적은 많지만 내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 칭찬받는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지금에 와서 나에게 글을 쓰라고 시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나마 의무적으로 작성하는 글이라면 회사에서 사람들과 주고받는 이메일 정도일까. 하지만 이런 이메일은 정해진 양식이 워낙 뻔하기 때문에, 13살 사촌 동생을 데려다가 ‘다름이 아니오라’ 정도만 가르치면 충분히 쓸만하니 별 의미는 없다. 그런데도 졸업 후 지금까지 매일 일기를 쓰고 이렇게 짤막한 단문이라도 쓰는 것은 그때 교수님이 해주셨던 칭찬 덕분이 아닐까 한다. 새빨간 얼굴로 있었던 한 시간 반이 나에게는 정말 강렬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도 글을 쓸 때마다 죽상을 한다. 이건 무조건 일필휘지다, 하는 소재도 막상 자리에 앉으면 한문단 이상 연속해서 써본 적이 없다. 재능이 없는 사람이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한 문장, 한 문장 밀어 나갈 때마다 느낀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는 때때로 교수님이 해주셨던 칭찬을 떠올린다. ‘자네 글 참 재미있게 쓰는구만’, ‘지금의 관점을 잘 발전시켜보게’라는 칭찬. 그러면 다시 한번 뻔뻔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나는 사실 글을 참 잘 쓰는 사람일거라고 말이다.


나 역시 그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철저한 경멸감으로 그것을 읽다 보면, 결국은 찾게 된다.
그곳엔 무언가 진정한 것이 깃들어있음을.

마리엔 무어 -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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