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광섭 Jun 25. 2019

‘자리 잡은 사람’이 된다는 것

지금 있는 그 자리로도 충분했으면 좋겠다


20대 후반, 긴장 잘 안함, 목소리 큼, 이 세가지 조건을 갖춘 남자 사람이 주말에 종종 맡게 되는 역할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결혼식 사회’ 자리다. 이 결혼식 사회라는건 딱히 어려울 것도 없어서, 1. 사람들을 자리에 앉히고, 2. 신랑과 나의 웃기는 에피소드를 하나 풀어낸 다음, 3. 대본에 써있는 걸 줄줄 읽기만 하면 끝이다. 다만 식이 끝나고 집으로 터덜터덜 향할 때 이제는 무려 ‘유부남(!)’이 된 친구를 보며 느끼는 생경함 정도가 유별난 부작용이라 하겠다.

얼마전, 고등학교 때 매일 붙어다니던 친구 하나가 결혼을 했다. 그날도 결혼식 사회를 맡아 식을 마친 뒤 밥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들어섰다. 식당 입구에는 나이 지긋해 보이는 아저씨 몇분이 큰소리로 껄껄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는데, 목소리가 하도 유쾌하여 그 내용을 찬찬히 들어보았다. ‘아 이제 강씨네 애도 자리를 잡았지. 암~ 요즘 애들은 너무 자리를 늦게잡는다니까’ 아저씨들은 화목한 결혼식에 만족하신 채 ‘자리잡음’에 대해 논하고 계셨다. 그날따라 이 단어가 무척 낯설게 느껴져 머릿속에서 둥실둥실 맴돌던 기억이 난다.


머리속으로 와 재가 결혼이라니 라는 생각을 하고있다


결혼식이 끝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자리잡음’이 또 한번 고개를 내밀었다. 몇달 전 육아를 시작한 학과 동기 한명이 단톡방에 아이 스냅 사진을 올렸는데(벌써 이런 나이라니), 친구들이 ‘와 이제 OO이는 완전히 자리잡았네’라고 말한 것이 발단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결혼식장 아저씨들의 목소리가 오버랩되니 무척 기묘했다. ‘자리잡음’이라는 것은 우리 어르신들만의 고유한 표현이 아니라 남녀노소 모두가 공감하는 어떤 상태를 뜻한다는 생각이 그때 처음으로 들었다.

그러니까 좀 더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에서 ‘자리’라는 것은 ‘결혼’, ‘내집마련’ ,’육아’라는 3신기를 모두 갖춘 완전체에게만 내려주는 일종의 칭호같은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 ‘자리’는 모두가 언젠가는 갖춰야할 하나의 덕목쯤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닐지. 조선시대에도 상투를 틀고 ‘자리를 잡은’ 10살 꼬맹이가 50살 노총각보다 어른 대접을 받았다고 하니, 이 명예로운 훈장은 그 역사마저 참으로 유구한 것이다. 그런 전통이 흐르고 흘러 오늘날 20대 남자애들 카톡방에 육아 사진이 올라오자 자리론이 거론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런데 누군가 이처럼 자리론의 가호를 받는다면, 그 밖의 사람들은 자리론에서 내쫓긴 처지가 된다. 눈에 보이는 조건이 있어야 달성할 수 있는 ‘자리’가 여전히 단단한 단어로서 위세를 떨쳐 사람을 자로 재듯 갈라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른들은 요즘 애들이 자리잡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워하시고, 친구들은 자리잡은 녀석을 대단하다며 부러워한다. 나이가 먹도록 결혼하고, 집사고, 아이를 키우지 못하는 사람은 회사에서도, 친척간에도 어쩐지 둥둥 부유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그 사람은 '자리잡을 나이'에 자리를 잡지 못한 것이니까.


나는 이 ‘자리론’이 조금 더 넓은 뜻으로 쓰였으면 좋겠다. 어떤 사람이 그냥 ‘난 지금이 좋아’하고 눌러앉을 장소를 찾고 만족해 보인다면 바로 ‘자리잡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모두 똑같은 조건이 아니라 각자 ‘자기만의 자리’를 갖는 분위기가 되었으면 한다. 누구는 혼자 누워있고, 누구는 아이들과 방방 뛰어도 자기만 행복하다면 모두 ‘자리잡은 것’으로 인정받는 세상이 되길. 눈에 보이는 조건이, 한 사람의 성숙을 결정짓지 않는 열린 마음이 퍼져나가길 바란다.


'어른'을 단순히 서술적인 용어가 아니라 자격의 용어로 취급하는 사람은 결코 어른이 될 수 없다.

C.S. 루이스
이전 07화 화내도 되는 회사에 다니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