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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섭 Nov 11. 2019

욕 먹는 맷집이란 없다

서비스 기획자가 코리안 조커들의 악플을 견디며


서비스 기획자로 살다 보면 때때로 '후후.. 셀럽의 삶이란 이런 것이로군'을 체험할 수 있는데, 대부분 좋은 의미에서 그렇다기보다는 나쁜 의미로 그렇다. 기획자는 유명 연예인과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사용자들의 '악플'을 온몸으로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글이글 불타는 악플은 대개 앱스토어 리뷰나 고객센터 메일, 혹은 오픈 채팅방 같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밀려든다. 악플을 봐야만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깨진 유리조각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생생한 공포감이 느껴진다.

서비스 관련 악플의 특징을 꼽자면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정상적인 피드백이 아니라는 점. 악플러들은 보통 ‘욕을 하고 싶어서 욕을 하기 때문에’ 본인의 어처구니없는 실수, 혹은 21세기 이후로 당연한 절차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며 화를 낸다. 예를 들어 지문 센서가 없는 스마트폰으로 지문 인증이 안된다며 화를 내거나(...), 로그인을 안 해놓고 내 정보가 없다며 역정을 내는 식이다.  둘째는 쌍시옷을 숨 쉬듯이  계속 쓴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씨’로 시작해서 ‘썅’으로 끝나는 수미'썅'관형 욕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서비스 운영 초창기에는 출근 후 룰루랄라 노트북을 켠 뒤, 이런 악플을 하나라도 보는 순간, 멀겋게 뜬 시금치 된장국처럼 이맛도 저맛도 아닌 상태가 되었다. 그나마 지금은 시간이 훌쩍 지났고, 나름 고급 방어구 세트도 탄탄하게 갖추어 ‘XX놈아!’라는 말을 보고도 ‘안녕하세요! 고객님ㅎㅎ’ 할 수 있는 홍진영 멘탈을 차차 구비하게 되었다. 오히려 주변 사람이 욕에 힘들어하면, ‘너 어른이야, 어른-!!’이라고 말하는 꼰대 짓도 능수능란하게 해낸다.

그러다 얼마 전 굉장히 참신한 욕을 봤다. 사용자가 욕을 쓴 사유는 지금 돌이켜보아도 어이가 없는 것을 넘어 신선하기까지 한데, 요지는 ‘왜 앱이 데이터를 소모하냐’며 분노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지금 무엇을 읽은 건가' 싶어 2번, 3번 소리 내서 읽어보았다. 하지만 그분이 노발대발하는 이유는 앱이  (켰을 때) 와이파이가 없는 곳에서 데이터를 연결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작성한 말은 더욱 가관이었는데 이곳에 줄글로 옮겨 적자면 'X같은 XX, 이걸 만든 XXXX XX가 XX 어쩌구저쩌구..' 조사 빼고는 단어마다 삐- 처리가 필요한 장문의 쌍욕이었다.


그냥 너가 싫으니까 싫은거에요. 이유는 없다구.


답글을 쓰기 위해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나도 모르는 새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제 이 정도 트롤쯤이야 마이구미 먹는 수준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부당한 욕을 마주하는 억울한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찢어졌다. 그나마 처음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성적인 나'가 쌍욕보다 더 큰 몽둥이를 휙-휙- 휘두르며 엉엉 우는 마음 뒤에 서있다는 것 정도. 이제는 마음이 모니터 속 괴수로부터 뒷걸음질을 치면 이성적인 나가 ‘어른스럽게 행동하라'며 한층 무섭게 윽박을 질렀다. 앞에는 리자몽, 뒤에는 지우놈을 둔 피카츄가 이런 심정이었을까.

그날은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어서 집으로 갔다. 집에 가면서도 내면의 질책이 계속 들렸다. '참 한심하다. 고작 얼굴도 모르는 사이코패스가 쓴 욕 몇 마디에 하루를 날리니? 너가 그러고도 프로야?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이 일을 이렇게 설렁설렁해도 돼? 무능한 인간' 그렇지만 그날만큼은 쉬어야겠다 생각했고 그래서 그냥 만사 무시하고 쉬었다.

가끔 피해자들이 악플러 때문에 받은 상처를 호소할 때, 사람들은 이렇게 위로한다. '그런 쓰레기가 날린 되도 않는 막말에 네 마음을 휘둘리지 말아, 널 좋아하는 사람이 훨씬 많아!' 그렇지만 이런 위로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이다. 그 욕이 쓰레기인 것도, 아무 의미 없는 것도 맞지만 그 말이 다른 좋은 말에 덮어지거나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남에게 욕을 먹는 것은 너무도 두려운 일이고 욕의 원인이 자기가 아닐 때 드는 속상함은 사람의 마음으로 견디기 힘들다.

유명 연예인들의 심한 우울증이나 자살사고가 보도되면 '아니, 이미 이골이 날만큼 단련된 사람이 어째 그랬대'라는 말도 흔하다. 하지만 욕먹는데 적응하는 사람은 없다. 또 이골이 나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욕 먹으며 튼튼해지는 맷집이란 없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그저 더 아픈 상처로 작은 상처를 꾹꾹 누르며 견디는 것이다. 마음의 상처를 심폐 지구력쯤으로 생각하고 단련한다는 것은 아주 큰 착각이다. 단련처럼 보이는 것은 '성숙한 나'와 '악플러' 사이에 끼어 참고 있는 자신이니까 말이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비판할 때는 좀 더 둥글게 말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돌을 던지고 싶을 때는 흑요석처럼 단단한 것이 아니라 왕꿈틀이처럼 말랑말랑한 것을 던졌으면 좋겠다. 나쁜 말을 쓰고 나면 마지막에 뽀로롱-(별) 같은 의태어가 추가되어도 좋을 것 같다. 얼굴을 보지 않는 상대를 욕할 때는 조금 더 너그러운 세상이 되길. 오고 가는 말속에 참기름같이 고소한 정 한 방울 냉큼 떨어트리는 세상이 어서-어서 와주길, 와장창 욕을 먹는 와중에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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