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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섭 Aug 22. 2020

엘리베이터 비상통화 버튼을
눌렀을 때

쓸데없는 말이 필요한 순간


아침 출근길,

회사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이었다.


'왜애애애애애앵!!!!!

비상통화!!! 왜애애애앵!!!'


갑자기 엘리베이터 안에서 쩌렁쩌렁

큰 소리가 울렸다.


지각 걱정에 마음 급한 사람들이

꽉꽉 끼어 타다 보니,

거기에 밀린 내 오른쪽 어깨가

비상 통화 버튼을 잘못 누른 것이었다.


소리만 들으면 '비상 통화'가 아니라

'비상 탈출'이나 '자폭' 버튼을

누른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 시간이 체감상 무지막지하게 길었다.


엘리베이터는 그렇게 장장

5초가 넘는 시간 동안

'비상통화!!!!'라고 울부짖고 있었다.


아마 버튼을 잘못 누른 사람에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똑똑히 각인시켜

평생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못하게 할 심산이거나,

진짜로 엘리베이터에 갇혀서 도움을 구하는 사람에게

격리의 공포감을 극대화하려는 목적인 것 같았다.


'제발 좀 닥쳐!!!... ㅠㅠ'

15명 즈음되는 사람의 당황한 눈동자를 한 몸에 받으며

버튼을 타다다다다다!! 눌렀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내 간곡한 손가락을

벌겋게 달은 의금부 쇠막대기쯤으로 받아들이는지

'비상통화!!!!!! 비상통화!!!' 하면서

똑같은 소리를 울부짖을 뿐이었다.


대충 3번쯤 죽고 싶고,

2번쯤 퇴사할까 고민하고,

4번쯤 주저앉고 싶은 시간이 지나자

드디어(!) 경비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ㅈ.. 죄송합니다.. 제가 버튼을 잘못 눌..'

이라고 말하려던 찰나,


귀까지 시뻘게진 멍청이(나)를

엘리베이터 맨 뒷자리에서

잠잠이 지켜보고 계시던

아저씨 두 분이 갑자기 '빽!'하고 소리를 지르셨다.

(시설 관리인 복장으로 공구를 들고 계셨다.)


'이 청년 잘못이 아니오!!!!!!!' (!?)


그때 딱 2가지 생각이 동시에 들었는데,

하나는 '대체 저분들은 나를 왜

'청년(?)'이라고 표현해주시지?' 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딱히 저기서 잘못했다고

하지는 않았는데 왜 화를 내시는 거야;;'

하는 요상한 의문이었다.


별일 아닌 것을 확인한 관리자가

통화가 무심히 끊어버리고 나자

엘리베이터 안에 묘한 적막이 흘렀다.


그러자 아저씨 두 분은

엘리베이터가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동안

새빨개진 멍청이(나)가 20명 사이에서

무안할까 걱정이 되시는지 꽁트를 시작하셨다.


'저 친구 어깨가 높아서 그래,

나는 저기 머리카락도 안 닿아'

'아니 버튼을 왜 저딴데다가 달아놔!!'

처럼 청자도 마땅찮고, 쓸데없지만,

꽤 따듯한 말들.


아저씨들의 혼잣말 논평은

MBTI 검사에서 '내향적임'을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받은 쭈글이에게

너무 큰 위로가 되는 말이었고,

같이 타고 있던 열댓 명의 사람에게는

불쾌한 경험을 킥킥 웃을만한 일로 바꾸어 준

마법 같은 말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긴 엘리베이터가

드디어 29층에 도착했다.


'방금 고맙습니다' 꾸벅 인사하고 후다닥 내렸다.

아저씨들은 쿨하게 '네- 좋은 하루'

하고 한마디 툭 던지시더니,

시설용 엘리베이터로 탁탁 발걸음을 옮기셨다.


일상을 지나오다 보면,

꼭 필요하지 않은 말이지만,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말들이 있다.


쓸데없는 말이 채워주는 부피감이

솜이불처럼 포근한 순간이 있는 것 같다.


부끄러운 상황을 남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준,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편들어준,

마음씨 따뜻한 새침데기 아저씨 두 분께.


앞으로 엘리베이터 비상 통화 버튼을 볼 때마다,

'고맙습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



[표지 출처] :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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