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남다른 민첩함: 주코쿠 대반전
"주사위는 던져졌다"
세계 각국의 역사서를 찬찬히 읽어가다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반드시 등장하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군대를 뒤로 돌리는 회군(回軍) 사건인데요. 역사의 전환기가 도래하는 시점이면 어김없이 말머리를 돌려 지나온 땅을 매섭게 노려보는 인물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보통 그 인물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주인공이 되지요.
각 나라의 역사에서 회군이 이토록 자주 회자되는 이유는 그것이 '극적'이기 때문일 겁니다. 길게 늘어선 병사들이 왔던 길을 되돌아 가는 모습, 이것만큼 역사의 흐름이 바뀌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는 없을 테니까요.
이런 회군의 '드라마틱함'을 한층 더 살려주는 것은 역사의 주인공들이 내뱉는 명대사들입니다. 갈리아 정복을 마치고 로마로 향하던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너며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는 희대의 명언을 남깁니다. 그로부터 1400년의 세월이 지나 동양의 압록강에서는 이성계라는 장수가 '내가 주상을 뵙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따져 묻겠다'는 선언을 하지요.
오늘 제가 다룰 회군 이야기의 주인공은 본인이 이렇게 멋진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최측근에 있던 부하가 역사에 길이 남을 간언을 한 것으로 유명한데요. '주군, 지금이 천하를 차지할 절호의 기회가 아닙니까'(天下を取るべき好機ではないか)'.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 조언을 들은 오늘의 주인공은 누구보다 빠르게 교토로 말을 몹니다.
이번 글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제패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주코쿠 대반전'과 그의 재빠른 상황판단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오랜 전국시대를 거친 일본은 바야흐로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마왕이라고 불리던 오다 노부나가가 자리하고 있었지요. 오다의 군대는 교토 지방을 중심으로 주변 다이묘(중세 일본의 지역 영주)들을 차례로 무릎 꿇리며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범같은 장수 밑에 약졸은 없다고 했던가요. 태풍의 눈인 오다의 밑에는 '오다 5 대장'이라고 불리는 유능한 장수들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당시 하시바 히데요시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도요토미로 통일하겠습니다.)와 에도 시대의 문을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모두 '오다 5 대장'을 대표하는 장수들이었습니다. 이 5 대장은 전국의 각지에서 오 다군의 선봉을 맡아 일본 천하통일의 최전선에 서 있었습니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관서 지방의 전통적인 강자였던 모리 가문을 굴복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승리를 목전에 둔 상태였습니다.
그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반란이 일어납니다. 불사신 같았던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인 아케치 미츠히데의 배신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인데요. 도요토미는 이 소식을 6월 3일 처음 전해 듣습니다. 도요토미가 아케치의 배신을 빠르게 알 수 있었던 것은, 아케치가 반란을 일으킨 뒤 모리 가문에 보낸 전령을 중간에 사로잡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존경하던 주군의 사망 소식을 듣자 도요토미는 큰 혼란에 빠졌다고 합니다. 아무렴 부엌데기 출신이었던 자신을 5 대장으로 만들어준 것은 오다 노부나가의 지극한 포용력 덕분이었으니까요.
위기의 순간 도요토미를 지켜보고 있던 책사 구로다 간베에는 주군의 눈을 똑똑히 쳐다보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제 천하를 얻으러 가야 합니다.' 놀라운 것은 도요토미가 이 말을 듣자마자 한 순간에 정신을 차렸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이야기는 매우 빠른 속도로 전개됩니다. 주코쿠 대반전은 전무후무한 속도로 인해 유명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전령을 체포한 6월 3일, 도요토미는 그 즉시 모리군에 평화 협정을 제안합니다. 너희 장수가 자결을 하면 포위를 풀어주겠다는 내용이었지요. 6월 4일 적장이 죽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도요토미는 곧장 주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교토로 진군을 시작합니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이른 6월 초에 장마가 시작됩니다. 도요토미의 군대는 장맛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70km의 거리를 단 30시간(!)만에 주파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서울 강남역에서 출발해 강원도 원주까지 단 하룻밤만에 걸어서(!!) 이동했다는 것인데요. 이게 정말로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일본의 역사가들도 이 점이 어지간히 궁금했던지 육상선수들로 실험을 해봤다고 합니다. 그 결과 놀랍게도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다만 몇 가지 조건이 따라붙었는데요. 가장 중요한 조건은 군대가 보급 없이 밥을 먹으면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극한 상황에 도요토미는 가장 기민하게 대응했습니다. 그는 행군을 시작하기 앞서, 부대에서 발이 가장 빠른 병사들을 뽑아 반나절 일찍 출발시킵니다. 그리곤 그들이 지나가는 마을마다 '곧 오다의 원수를 갚아줄 도요토미의 군대가 지나가니 주먹밥을 미리 준비해 놓으라'라고 전했다고 합니다. 비천한 출신으로 인해 관서 지방 서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도요토미는 백성들의 응원을 받으며 배신자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들이밉니다.
아무도 도요토미의 군대가 이렇게 빨리 도착할 것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오다를 죽였던 아케치 미츠히데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던 다른 5 대장에게 대응하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때 도요토미의 군대가 목전에 들이닥친 겁니다. 전투의 결과는 뻔했습니다. 아케치는 도요토미에게 무참히 패배했고 도망치던 와중 산적의 칼에 목숨을 잃습니다. 이제 주군의 원수를 갚은 도요토미는 당당히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서 우뚝 섭니다. 세상에 '천하를 통일하는 것은 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라고 외치면서 말이죠.
한국사람들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초토화시킨 최대 원흉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일본에서도 조선을 공격했던 것은 희대의 바보짓이라는 견해가 중론입니다. 그러나 그가 흉흉한 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일본 통일의 문을 열었다는 것만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한 신분에서 출발하여 일본 최고의 실권자가 되기까지. 그 중심에는 번개보다 빠르게 움직였던 그의 기민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리더는 누구보다 재빠르게 움직여야 합니다. 단 하루 이틀 차이로 천하의 주인이 뒤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자료: 월간조선, 왕건의 통일 전략을 생각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위키피디아
이미지 출처: Antique art morimiya, 빗츄 다카마쓰 위키백과, 山崎合戦官軍大勝利之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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