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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섭 Aug 31. 2018

반성하는 리더의 '위대한 실패'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실패와 극복: 미카타가하라 전투


'오늘의 내 모습을 초상으로 남겨 젊은 날의 혈기가 불러온 실패를 늘 경계하겠다.'

위대한 영웅들은 모두 세상을 변화시킬 눈부신 성공 신화를 써왔습니다. 그러나 그 신화의 뒷편에 수많은 실패와 좌절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도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요. 한 예로 미국의 남북전쟁을 종식시켰던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은 젊은 시절 알콜 중독과 우울증으로 군에서 쫓겨난 낙오자였습니다. 아무도 이런 술주정뱅이가 미국의 분단을 막을거라곤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제2차 세계대전기 위기에 빠진 영국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이 있습니다. 그는 해군 장교 시절, 어리석은 판단으로 갈리폴리 전장에 수많은 병사들을 수장시켰던 실패자였는데요. 그렇지만 바로 이 사람이 훗날 영국의 모든 국민을 일치단결 시키는 명연설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는다(We shall never surrender)


와 같은 영웅들의 공통점은 한번의 실패에 멈춰서지 않고, 그곳에서 더 큰 교훈을 얻어 세계사를 바꿀 거대한 인물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런 '위대한 실패'를 주제로 일본의 한 지도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그 인물은 전국 시대를 마무리하고 에도(도쿄) 중심의 일본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때는 157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와 함께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도쿠가와변방 지역 소규모 영주에 지나지 않았는데요. 이 때문에 그는 오다 노부나가의 동맹으로 들어가 여러차례 전투에 참여하며 실력을 촉망받는 다이묘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오다 가문이 주변의 유력한 다이묘들을 포섭하거나 굴복시키며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가자, 당대의 쇼군(최고 실권자)은 신변에 위협을 느껴 '오다 노부나가 토벌령'을 내리게 됩니다. 항상 오다와 도쿠가와를 경계하고 있던 '전국 의 호랑이' 다케다 신겐은 쇼군의 명령에 '얼씨구나!'무릎을 칩니다. 그리곤 이를 구실 삼아 3만명의 병사 오다를 멸망시키기 위한 공격을 시작하지요.


이때 도쿠가와는 도토미에 있는 본인의 성에서 '버티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식량과 무기를 잔뜩 쌓아놓고 '적군이 오기만 해봐라' 잔뜩 벼르고 있던 상태였죠. 그런데 다케다 군은 이런 전략을 비웃기라도 하듯 도쿠가와를 지나쳐 곧장 서쪽으로 진군을 계속합니다. 유유히 멀어져 가는 다케다 성안에서 지켜보던 도쿠가와는 바로 성문을 열고 뛰쳐나와 오다군과 함께 추격을 시작합니다. 다케다 신겐의 지략과 용맹함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주요 가신들은 '주군 지금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을 하셔야 합니다'라며 도쿠가와를 부득부득 설득하지요. 하지만 도쿠가와는 이때 가신들의 말을 듣지 않고 본인의 독단대로 판단합니다.


더욱이 도쿠가와 연합군은 전략적으로도 아주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바로 그 유명한 학인진을 펼쳐 다케다 군을 전멸(!)시키려고 한 것인데요. 이런 식은 전술은 병법의 기본을 어긴 아주 무모한 작전이었습니다. 학익진은 사거리나 병사의 수 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한 경우에만 유효한 전략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도쿠가와 연합군은 1만명, 다케다 군은 2만명의 군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가 적은 부대가 압도적인 다수를 포위하겠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었죠. 얇은 비닐봉지로 철근을 나르겠다는 것과 비슷한 전술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비닐이 찢어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을까요?


포위하려는 도쿠가와, 뚫으려는 다케다


학익진 소식을 들은 다케다는 도쿠가와 연합군의 어이없는 전략에 정공법으로 대처합니다. 그는 곧장 군사들을 물고기 비늘 모양으로 촘촘히 배치했는데요, 이런식의 포진을 어린진(魚鱗陣)이라고 합니다. 상대방의 포위망을 단번에 뚫을 수 있는 진영이었죠. 결국 이 비상식적인 전투는 한나절만에 끝이 나고, 도쿠가와 연합군은 2000명에 달하는 병사를 잃습니다. 반면 다케다 군은 오직 200명의 손실만을 겪었을 뿐이었습니다.


도쿠가와는 수많은 가신들의 희생을 통해 간신히 목숨만 건진 채 허겁지겁 도망칩니다. 그리곤 도토미에 있는 하마마쓰 성으로 숨어들게 되요. 이때 일설에 의하면 도쿠가와가 도망치는 와중 말 안장에 똥을 쌌다고(!)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리곤 놀라는 부하들 앞에서 볶은 된장(?)이라며 기가차는 변명을 했다는 사실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실제 베트남 전쟁  공포로 인해 분뇨를 조절하지 못한 경험이 있는 병사가 20%나 된다는 보고가 있는 것을 생각하면 도쿠가와의 치욕도 완전히 거짓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을 겁니다.


얼굴을 들 수 조차 없을만큼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던 도쿠가와는 그러나 절체절명의 순간, 조금은 남다른 면모를 보여줍니다. 바로 자신의 거처에 곧장 화공을 불러 '지금의 내 모습을 그림에 담아 달라'고 요청한 것인데요. 이때 도쿠가와는 '오늘의 내 모습을 초상으로 남겨 젊은 날의 혈기가 불러온 실패를 늘 경계하겠다.'고 말합니다. 당장에라도 다케다의 군대가 자신을 죽이러 올지도 모르던 절박한 때에 스스로의 실패를 기록으로 남기고 깊이 반성하는 다이묘.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도쿠가와는 수십년 뒤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게 아닐지요? 흔히 '도쿠가와 우거지상'이라고 불리는 이 그림은 그가 죽은 뒤에도 쇼군 가문에 대대로 전해져 경솔한 행동을 막기위한 교재로서 톡톡히 활용됩니다.


쓰라린 패배에 얼이 빠진 '도쿠가와 우거지상'


미카타가하라에서 멸망 직전까지 몰렸던 도쿠가와 연합군은 2년 뒤 나가시노에서 다케다 신겐의 아들과 또 한번의 결전을 치릅니다. 이번 전투에서 도쿠가와는 미카타가하라와는 완전히 달라진 철두철미함을 보여줍니다. 그는 신형 철포와 울타리로 진영을 철저하게 방비하고 다케다 군의 돌격을 가뿐하게 막아냅니다. 그 뒤로는 냉혹한 반격을 시하지요. 이로 인해 다케다 군은 10,000명 이상의 병력을 잃고 주요 가신들의 대부분이 전사하고 맙니다. 결국엔 얼마 지나 않아 가문 전체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이제 거칠 것이 없어진 도쿠가와 연합군은 전국 통일의 시대를 향해 한껏 박차를 가합니다.


울타리와 총포로 철저한 수비진을 만든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별명은 관동의 너구리입니다. 그만큼 본인의 의중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매사 신중한 일처리로 유명했다는 뜻입니다. '때때로 성급한 면이 있었다'는 일화가 전해지지만 이런 에피소드가 강조되는 것도 그가 평상시 얼마나 신중했는지를 알려주는 방증이라고 할 것입니다. 에도 시대라는 새로운 역사가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영웅들이 전장에서 피고 졌지만 결국 새시대의 문고리를 훽 열어젖힌건 실패를 딛고 성장했던 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습니다.




*훗날 거인으로 성장하는 리더는 실패를 통해 배울 줄 압니다. 자신의 실패를 주변에 떳떳하게 알리고 이를 통해 발전하는 대범함이 필요하겠습니다.


#역사 #일본 #일본사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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