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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섭 Dec 02. 2018

현관문에서 생각하는 남과 여

누군가는 나의 일상이 무섭다


'야 나 이사 좀 도와줘'


예전에 같은 과 여자 동기의 이사를 도와줄 때였다.  동아리 활동부터 시작해서 수업까지 함께 듣던 친구였으니 그 정도 부탁쯤은 어렵지 않았다. 친구의 이사는 바로 옆 건물로 이삿짐을 옮기면 되는 비교적 간단한 작업이었는데, 여자애 혼자서 다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나와 내 다른 친구(남자 2명)는 짜장면에 탕수육 大자 그리고 저녁에 치킨까지 사준다는 계약서에 도장을 쾅쾅 찍고 그 친구의 이사를 도와주러(밥을 먹으러) 갔다.


한참 옷가지들을 옮기며 '조심성이 없네', '어지르기만 하네' 등등 다양한 사유로 투닥거리고 있는데 현관문 틀에서 조그만 포스트잇이 하나 떨어졌다. 노란색 포스트잇에서 이런 내용이 적혀있었다.


안녕하세요! 돈은 봉투에 넣어 두었습니다.
음식은 문 앞에 두고 가주세요! 감사합니다.



천천히 그 포스트잇을 집어 들고 무척 알쏭달쏭하다고 생각했다. '음식을 왜 이렇게 받는 거지?' 그래서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야 이거 뭐야? 이거 너쓴 거야?' 그랬더니 친구가 놀라운 대답을 해줬다. '응. 혼자 사는데 무서워서. 나는 잘 안 시켜먹는데, 가끔 어쩔 수 없을 땐 이렇게 해. 이렇게 하는 여자들 엄청 많을걸'


그 포스트잇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배달 음식이나, 택배를 받는 '귀찮은 일'이 누군가에게는 '무서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아저씨가 초인종을 누르면 '네'하고 외치며 현관문으로 달려 나가는 루틴이 초등학시절부터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었. 배달 아저씨가 철가방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오건 말건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무척 친절한 행동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그것은 덩치가 큰 남자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한 '무신경함'이었다.


누군가는 똑같은 상황에서 포스트잇을 붙이고, 집 안에 남동생이 있는 척을 하고, 신발을 두 켤레씩 가져다 놓아야 하는 것이다. 나한테는 자립심 강하고 똑 부러지고 강단 있는 친구일 뿐이었는데, 그런 친구에게 조차 '나의 일상'은 무섭고 조심해야 하는 '일'었다. 참 놀랍고, 어떻게 보면 황망했다. 지금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당연한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공포이겠지만, 이런 계기가 없다면 나는 앞으로도 영영 그것을 모르는 바보로 살아야 한다는 게 무섭고, 부끄러웠다.


오늘 우연찮게 그 이야기를 남자들만 있는 모임에서 말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그날 상상도 못 해본 포스트잇에 정말 많이 놀랐고, 그 뒤로는 여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생각보다 반응이 굉장히 시큰둥했다. '남녀는 평등한데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그런 식의 행동은 나를 잠재적 범죄자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쁘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젠더 감수성에 대해 공부하라는 말까지 들었다. 도대체, 그 감수성 공부란 무엇일까.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 외에 책으로 공부하는 감수성의 실체란 뭘까. 그렇지만 괜히 큰 싸움이 일어날 것만 같아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냥 궁금하다. 요즘에는 내가 이상한 건지 세상이 이상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오직 격한 무공감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점점 허심탄회하게 말할 사람을 잃어가는 기분이다. 그저 서로 작은 공감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데, 그게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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