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유진 Nov 01. 2020

와온해변에서 컵라면을

꿈같고 환상적인 와온해변에서 컵라면을 먹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


몇 년 전 친구와 함께 순천과 여수로 2박 3일 동안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사실 여름에 갔으면 더 좋았을 관광 명소들을 겨울에 봐서 아쉬운 점들이 있었지만 친구와 함께한 순천-여수 여행은 그래도 꽤 즐거운 추억을 남긴 겨울 여행이었다.


여수로 넘어가기 전 순천에서 우리는 와온해변이 일몰로 유명하다기에 이 곳을 마지막으로 여행할 참이었다. 하지만 운이 나쁘게도 날씨가 무척 흐렸었다. 그때 친구랑 나는 그래도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안일한 희망으로 택시를 탔었다.


"어디로 가세요?"

"와온해변으로 가주세요."


그렇게 우리를 태운 택시는 와온해변으로 향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일몰을 볼 수 있을 거라는 낙관적인 희망은 점점 불안감으로 변해갔다. 날씨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일몰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지나고서야 도착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이미 확인했는데도 핸드폰을 자꾸 켜서 시간과 날씨를 계속 확인했었다. 택시 기사님은 보다 못하셨는지 지금 가 봤자 날씨도 무척 흐리고 이미 어두워져 일몰을 보긴 힘들 거라고, 돌아가는 게 좋을 거라고 조언을 해주셨다.


"어떡할래..?"

"어떡하지.."


나는 친구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며 돌아가는 게 좋을지 아니면 일몰을 못 보더라도 와온해변으로 갈지 선뜻 쉽게 답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잠깐의 고민의 시간을 가진 뒤 결국 우리가 내린 답은 '그냥 가자'였다. 이미 택시는 출발지점으로부터 꽤 달리고 있었다.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일몰을 보진 못한다 하더라도 와온해변을 방문하자는 것이 우리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와온해변에 도착했다. 일몰의 풍경은 없었고 어둡고 흐린 날씨만 눈에 가득 찼었다. 사실 그때 내리자마자 좀 무서웠었다.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 몇몇 사람들이 근처에서 불을 지피고 있었고 여행을 하고 있어서인지 그 불 조차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몇 차례 찰칵 찍은 뒤 우리는 바다 가까이 한 걸음씩 다가갔다.


* 그때 당시 와온해변 사진


태어나서 이런 바다 풍경을 본 적은 처음이어서 넋을 잃었었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는 물에 번진 듯 선명하지

않았고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섬들과 반짝이는 불빛들이 촘촘하게 보였다. 현실이 아닌 꿈속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 나는 마치 애니메이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생각났다. 주인공 치히로가 엄마 아빠와 함께 기묘한 신의 세계로 발을 들였고 치히로의 엄마와 아빠는 신들의 음식을 먹은 대가로 돼지로 변해버린다. 치히로는 너무 놀라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려는 찰나, 그 길은 바다로 잠겨 버리는데 딱 그 장면과 분위기가 떠올랐다.  내가 살고 있는 현실과 다른 어떤 이질적인 세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친구와 나는 이 몽환적이고 묘한 풍경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을 한 참이나 찍다가 또 바다 저 수평선 너머를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또다시 사진을 한 참이나 찍었었다.

*당시 와온해변에서 찍은 사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날씨는 추웠고 이제 더는 있을 수가 없어서 버스 차편을 알아보니 글세 버스 배차시간이 길어 1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었다. 밤은 점점 깊어져 갔고 사람도 별로 없어서 또다시 조금 무서움을 느꼈었다.


"우리 저 사람들 보고 태워달라고 할까?"

친구가 슬슬 출발하려는 어떤 차를 보며 얘기했다.


그때 나는 모르는 사람 차에 함께 타기가 불편했었다. '글쎄..'라고 말하는 사이 차가 벌써 출발해 버렸고

결국 우리는 여기서 1시간을 더 있어야 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게 그곳에는 슈퍼마켓이 있었다. 주위는 완전히 어둠에 잠겨 버렸는데 그 슈퍼마켓만이 불빛을 가지고 있어 마치 땅 위에 있는 등대같이 느껴졌었다. 우리는 그 슈퍼마켓으로 가서 배도 채울 겸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슈퍼마켓에서 각자 컵라면을 샀었다.


컵라면에 뚜껑을 약간 뜯어내고 수프와 뜨거운 물을 붓고 밖으로 나와 테이블에 앉아 컵라면에 손을 댄 채 빨리 먹을 수 있기를 기다렸다. 비록 약 1시간이나 버스를 더 기다려야 했지만 문득 왠지 모르게 저 꿈같고 환상 같은 바다를 보며 라면을 먹는 것 또한 여행의 낭만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몰 풍경을 못 봤지만 생각지도, 예상하지도 못한 와온해변의 또 다른 풍경을 보았다. 만약 그때

우리가 일몰을 못 보게 생겼으니 그냥 발길을 돌렸으면 과연 이런 몽환적인 경험을 할 수 있었을까?


그때 친구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했었나 보다. 우린 그 주제를 가지고서 짧게 이야기를 나누고 라면을 먹다가 또 멍하니 까마득한 수평선 너머의 바다를 보다가 다시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었다. 춥긴 했지만 뜨겁고 매콤한 라면과 얼큰한 국물이 추위로부터 감싸주는 것 같아 괜찮았고 무엇보다 이런 바다를 보며 컵라면을 먹는 것이 무척 새롭게 느껴져서 추위 따위는 견딜 수 있었다. 그렇게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1시간이라는 시간은 어느새

흘러가고 우리는 무사히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그 몽환적인 바다의 풍경과 추위로부터 나를 감싸주었던 컵라면의 온기를 잊을 수가 없다.

*위 그림은 그때의 감정을 기억하며 그림을 그려 보았다. 

이전 05화 빼빼로 영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