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하려면, 먼저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 근질근질한 것을 만들 것
1995년 봄, 도쿄에 갔다. 첫 해외 출장이었다. 출발 전날, 옆자리 선배가 용돈이라며 2만원을 주었다. 트렁크를 사러 지하상가에 다녀오다가 선배가 내미는 봉투를 얼떨결에 받았다. “받아요. 주면 그냥 받는 거야.” 목적을 알 수 없는 돈을 받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데 출장을 다녀온 뒤 선배에게 나는 무슨 선물이라도 주었는지 모르겠다. 받은 건 기억나는데 준 게 생각 안 난다.
홀수 해마다 승용차 주제로 열리던 도쿄모터쇼 출장. 매체에서 자동차를 담당하는 사람으로서 그 이상 흥분되는 일이 없었다. 세상에, 모터쇼라니! 잔뜩 기대에 들떠 비행기를 탔다. 세계 3대 모터쇼니, 4대 모터쇼니 하면서 위세 당당하던 시절. 도쿄모터쇼엔 볼거리가 넘쳐났다. 요즘 말로 콘텐츠라 부르는 다채로운 행사 내용. 전시박람회에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이 가득했다. 언론과 경쟁사의 집중 관심을 받는 신차 발표회는 물론 신기술을 돋보이게 하는 갖가지 기발한 쇼 프로그램이 장대한 마쿠하리 멧세를 가득 채웠다.
프레스데이를 한나절 보고나니 정신이 혼미했다. 뇌가 기함할 만큼 과도한 정보에 치이기도 했지만 우선 육신이 고달팠다. 각 브랜드 부스마다 제공하는 자료는 실로 엄청났다. 미리 커다란 트렁크를 챙겼음에도 슬라이드 필름과 카탈로그, 책자, 온갖 기념품들이 트렁크와 가방 몇 개를 순식간에 채웠다. 나중에는 커다란 화물 운반용 카트를 구해 자료더미를 가득 싣고 전시장을 돌아다녀야 했는데, 그 몰골이 마치 피곤에 전 장내 청소용역 비슷했다.
전 세계에서 몰려온 기자들은 중간중간 전시장 구석에 모여 앉아 받은 자료를 무더기로 쌓아두고 정리를 했다. 말이 정리지 덜 필요한 걸 골라 버리는 일이었다. 제공하는 자료는 일단 전부 받는다. 10분 단위로 계속 행사가 이어지는데, 자료를 원하는 기자와 참가자들은 넘쳐나고 줄 서서 주는 대로 받다 보면 그게 중요한 것인지 아닌지를 즉시 판단하기 어려웠다. 무조건 받고는 잠시 숨 돌리는 틈에 구석진 곳에 쭈그리고 앉아 자료를 취사하는 것이다.
대부분을 버려도 챙겨야 할 자료는 너무 많았다. 그래서 DHL 같은 국제 특송 서비스를 활용해 현장에서 자료를 묶어 국내로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한 짐 싸서 보낸 뒤에도 트렁크는 터질 듯 배가 불렀다. 그렇게 바리바리 담아온 잡동사니들이 나중에 두고두고 기사에 우려먹을 재료가 되었는데, 인터넷과 첨단 저장매체가 등장한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모터쇼 취재란 아득한 원시 풍경처럼 느껴진다.
첫 번째 모터쇼 출장 이후 거의 매년 모터쇼를 참관했다. 생각해보면 다른 것에 비해 천양지차 달라진 것이 자료 전달과 수집 방식인 것 같다. 프린트 사진과 슬라이드 필름, 두꺼운 책자와 카탈로그에서 플로피 디스크로, 다시 SD카드나 USB로, 나중에는 마이크로사이트 주소나 QR코드만 받으면 되니 너절한 카트와 트렁크 따위는 필요 없게 되었다. 바야흐로 모든 이슈가 모바일로 라이브되는 즉시 공유의 시대가 아닌가.
그 시절 화려하던 쇼는 자꾸 소박하고 검소하고 조용해졌다. 시대의 변화 때문이겠지. 그렇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있다. 관람객이다. 새로운 것을 직접 몸으로 접한다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여전히 흥분되는 일이다. 모터쇼가 예전만큼 그 중요도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사람들은 줄지어 신형 차를 먼저 보기 위해 쇼장을 찾는다. 자동차는 언제나 사람들의 관심사이고 최신의 상품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볼 수 있다는 경험의 흥분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아는 메이커들도 신제품의 성패를 정확히 가늠하는 자리로 쇼장을 활용한다. 고객에게 선보이는 무대, 쇼가 중요한 이유다.
무엇보다 쇼장은 산업계의 흐름을 피부로 목도하는 자리다. 비단 해당 산업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 트렌드가 쇼 프로그램에 가감 없이 반영된다. 쇼는 흥행이 필수이고 당연히 당대의 관심을 고스란히 노출할 수밖에 없다. 예전 출장 사진과 묵은 취재 수첩을 들춰보면 이 인과를 확신하게 된다.
사람이 없고 차만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품성이 더 부각될까, 아니면 허전할까? - 2015서울모터쇼
오늘날 모든 비즈니스 활동의 목적은 단 하나, ‘파는 것’으로 귀결된다. 서비스든 상품이든 누군가에게 팔아서 환금하는 것. 그래서 어떻게 팔 것인지는 일하는 자들이 끝없이 매달리는 완고한 숙제다. 팔리지 않는 것에는 어떤 아름다움도, 가치도 깃들 여지가 없다. 소비의 시대에서 존재의 이유는 오직 팔리는 것에 있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내 글도, 내 책도, 내 상품도, 내 아이디어도 필사적으로 팔리기를 원한다. 언제나 드는 생각이다.
잘 팔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팔고자 하면 팔리는가. 정보가 일방으로 흐르던 때는 가능했다. 새로 만들면 무조건 매매되던 시대. 최신 모터쇼 기사를 읽기 위해 당월호 잡지가 서점에 깔리기를 목 빼고 기다리던 때. 주고 싶은 것을 주면 되었고 그것은 판매되었다. 모터쇼든 전시회든 박람회든 모든 비즈니스 쇼는 말 그대로 보여주는 기회다. 경험을 제공하는 절호의 찬스. 그것은 선배의 귀한 2만원을 받아 들고 어리바리 떠났던 첫 출장의 그때와 지금이 다르지 않다.
알량하지만 내가 배운 교훈은 이것이다. 주의하라. 팔려고만 하면 필시 망한다. 먼저는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어 안달인 것을 만들 것. 그 다음에 보여주면 된다. 쉽다. 쉽고 말고. 그래서 내 글이, 내 아이디어가, 내 모습이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누구 보여주지 못해 근질근질한 그 무엇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