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 창궐의 시대, 이 이야기의 끝을 나는 모르지만
#1
인왕산 자락길을 걷는다.
작은 팻말이 눈에 툭 걸린다. 공공장소에 흔히 보이는 명언.
종이 코팅이 울타리에 매달려 있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명언이 싫지 않지만 이런 방식은 못마땅하다. 깨달음을 강요하는 것 같아서.
공짜 길을 걸으며 이 정도 묵상은 해야 한다는 건가.
나무에 매달고, 화단에 꽂아놓은 식물 이름표도 마찬가지. 대개는 맞지도 않고 미관을 해친다.
식물은 ‘이름 모를 어떤 것’일 때 안전하다.
어여쁜 이름표를 걸어주지 않아도 산수유와 생강나무는 어느 세계에서도 차별 받지 않는다.
가장 끔찍한 건 등산로에 '산불조심'이라고 크게 써 붙인 현수막이다.
거대한 자연석을 캐다가 '자연보호'라고 음각으로 새겨서 공원 앞에 세워두는 일은 또 어떻고.
자연을 학대하면서 자연을 사랑해 달라고 외치는 뻔뻔한 이율배반이다.
팻말을 읽어본다.
이마누엘 칸트의 명언이다.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조건;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셋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
금방 외웠으니 걸으며 곱씹어봤다.
옳은 말이다.
사람이 일을 할 때 행복하지. 일 없어 본 사람은 알리라.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해도 마찬가지. 사랑이 흥건할 때 행복을 느낀다.
여기에 앞으로 잘될 거라는 기대가 있다면 행복하지 않을 도리가 없겠지.
그러다 생각하게 된 건 세 가지가 별개가 아니라는 것.
어느 한 가지가 아닌 세 가지 모두가 충족될 때라야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라도 결여될 때 행복은 불안하다.
해야 할 일이 있지만 앞날이 불투명하거나, 누군가를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단지 불행한 것에 그칠 수 있을까.
그는 벌써 지옥에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 잠깐 소름이 돋았다.
#2
바이러스가 창궐한 도시.
산 아래 보이는 거대 도시의 공기가 온통 오염된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유례없는 전염병의 유행은 사뭇 공포스럽지만 혼란의 와중에도 생각할 여지를 준다.
어떨 때 사람은 끔찍할 만큼 이기적이지만 대부분 사람은 배려와 절제를 잃지 않는다는 것.
이번 전염병에서도 여지없이 그걸 확인하고 있다.
삶이 위태해지고 나라가 곧 망할 것 같은 위협의 뉴스 속에서도 서로 돕고 손 내밀고 등 두드리는 단결의 대오를 보았다.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으로 뛰어든 의료인들, 공적 마스크 판매를 대행하는 약사들, 노약자를 위해 기꺼이 마스크 구매를 포기하는 사람들, 지역 의료원을 개방하고 타 지역 환자를 선뜻 받아들이는 지역 주민들, 세입자를 위해 임대료를 깎아주는 건물주들, 성금을 내고 물품을 지원하고 쌀을 보내는 사람들.
그리고 이런 소식에 ‘좋아요’를 누르며 공유하고 동참하고 응원하는 많은 우리들.
이름표도 필요 없는 장삼이사 필부필부.
재택 근무, 자가격리, 사회적 거리두기는 일상을 무력하게 만든다.
이 와중에 클릭수를 노리는 선정적 뉴스들은 우울감을 증폭한다.
논쟁과 비난과 차별이 야기된다.
혼란의 과정에서야 이성적 비판과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결국 위험 앞에 중요한 건 공감과 연대가 아닐까.
우리는 인간이므로, 끝내 사악해지지는 말아야지.
#3
이 이야기의 끝을 나는 모르지만
무엇이 우리를 견디게 하는지는 조금 알 것 같다.
그것의 이름은 사랑이다. 우리 모두 아는 이름.
늘 함께였으나 한 번도 유심하지 않은 사랑의 정체.
사랑은 모든 갈등과 반목과 혐오와 증오를 타파할 힘을 가졌다.
고맙게도 그것은 무려 공짜다.
이제 소포클레스의 말에 유념할 일이다.
“낱말 하나가 삶의 모든 무게와 고통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그 말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내 앞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서로 눈을 맞추며 우리의 해피엔드를 기대하는 것이다.
몰랐지만, 우리 모두는 지금껏 차고 넘치는 사랑의 수혜자였으므로.
-20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