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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페세 May 29. 2023

도쿄 골목을 걸으며

걷기 좋은 길은 편안하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얼마 전 도쿄에 갔다. 

일정 중 하루 여유가 있어 도심 골목을 걸을 기회가 있었다. 천천히 걷는 동안 문득 깨달은 게 있다. 골목에 불법 주차가 없다는 사실. 쓰레기나 담배꽁초도 없지만 초행길 도보 여행자에게 주차된 차가 없다는 건 일종의 감동이었다. 차들로 가득한 서울과 달리 골목이 한산했다. 당연히 걷기 수월했고 작은 식당과 가게들, 정갈한 정원과 지붕 같은 풍경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자전거조차 길턱이나 건물 안쪽에 반듯하게 세워져 있었다. 보행에 방해되지 않도록 신경 썼다는 걸 단번에 알아챌 만했다.


일행에게 들으니 도쿄뿐 아니라 일본엔 불법 주차가 거의 없다고 한다. 일본은 오래 전부터 차고지 증명제를 시행 중인데, 차를 살 때 거주지 인근에 주차장을 확보했다는 증명이 있어야 차량등록증을 받을 수 있다. 도쿄는 ‘주차비 몇 년이면 차가 한 대’란 말이 있을 만큼 주차비가 비싼데, 심지어 자전거에도 주차비를 물린다. 자전거 주차료는 한 달 우리 돈 5만 원 정도란다. 불법 주차 과태료도 무시무시하다. 최소 12만 원 이상으로 우리의 세 배가 넘고 단속도 철저하다.


아파트에 살아도 주차 면이 부족할 경우 추첨을 통해 결정하는데, 떨어지면 인근 주차장을 유료로 사용해야 한다. 도쿄 골목마다 크고 작은 주차장이 빼곡한 이유다. 동그란 돌출 간판에 ‘滿’ 또는 ‘空’ 글자가 붉고 푸른 사인으로 표시돼 직관적으로 주차 상황을 알아볼 수 있게 해놨다. 주차장이 아니면 차를 세울 수 없도록 강력히 규제하고, 주민 편의를 위한 주차환경을 제대로 정비해 놓은 것이다.


시행 초기에는 서민 부담이 과중하고 자동차 판매가 줄어든다는 이유로 불만이 컸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당연하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아 도쿄 어디서도 부정주차로 인한 난삽한 풍경은 보기 어렵다. 제도가 문화로 자리잡은 모범 사례다. 질서와 준법이 우선이라는 데는 논란과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운전자가 보행자를 끈질기게 기다려주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건널목뿐만 아니라 주차장 입구에서도 보행자가 길게 줄지어 지나가도 아무도 경적을 울리거나 차를 움직이지 않았다. 철저한 보행자 우선이 몸에 밴 듯했다. 

일본인의 인성이 좋아서, 제도가 훌륭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관습화된 문화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일본인은 자녀에게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옷깃만 스쳐도 입에서 “스미마셍”이 자판기처럼 튀어나온다. 이번 여행에서도 가장 많이 들은 일본말이었다. 골목 불법 주차가 사라진 것이 이웃에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집단 의식의 산물인지, 아니면 강력하게 시행한 제도의 결과인지 판단하긴 어렵다. 짐작컨대 아마 둘 다이지 않을까.


일본 이야기를 하다보니 또 다른 일본어, ‘유도리(ゆとり)’가 생각난다. 융통성이나 신축성, 여유 등의 의미인데, 우리는 흔히 ‘그때그때 형편과 상황을 보아가며 적당히 일을 처리하는 것’ 정도로 사용한다. ‘인간미’ 또는 ‘타협’ 정도의 말과 익숙하게 엮인다. 내 생각엔 우리가 겪는 많은 일, 결과적으로 참혹한 상황을 가져오는 행위의 대부분은 ‘유도리’를 용인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 같다. 특히 안전과 관련된 것들이 그렇지 않은가. 적당히 ‘유도리 있게’ 넘긴 일들이 일으킨 끔찍한 재앙을 우린 똑똑히 보았다.


이쯤에서 한창 논란인 ‘우회전 일시정지’ 제도가 겹쳐진다. 제도가 마련된 지 수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단속하는 경찰은 설명하기 바쁘고, 단속당한 시민은 항변하기 바쁘다. 기준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규칙이 까다로운 것도 아닌데 왜 길에서 언쟁을 벌일까. 규칙은 지키면 되고 어기면 처벌하면 되는데.


우리가 기본을 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정지선에서는 일단 멈춘다(일단정지, 또는 우선멈춤이라고 써 있다). 

사람이 지나면 멈춘다(당연하다). 운전자와 보행자는 눈을 맞춘다(사고를 예방한다). 서로 조심한다…. 

너무도 기본적 소양이 아닌가. 


배려는 아름답지만 강요할 수 없다. 그러니 법과 질서 같은 사나운 용어가 등장한다. 기준이 세워지면 좀 강력하게 시행하자. 못 들었다. 몰랐다. 어렵다. 핑계와 항의에 휘둘리지 말고 제대로 집행하자. 알다시피 법과 기준은 잘못이 없다. 이리저리 바뀌는 정책과 일관성 없는 집행이 언제나 문제일 뿐.


미디어 시승을 위해 미국과 유럽에 가면 사전에 반드시 듣는 엄정한 주의사항이 있다. 교통법규를 준수할 것. 당연한데 왜 강조하는가. 범칙금과 처벌이 무시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선진 교통문화를 자랑하는 나라들에 법 규정이 엄정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문화는 정착되는 데 오래 걸린다. 사람들이 착해서 선진 문화가 만들어진 게 아니다. 법과 규칙은 공정하고 엄정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운전자는 법 무서운 줄 알고 누가 보든 안 보든 지키는 것. 그게 체화될 때까지. 그래서 문화란 편안하고 한가롭게 거저 만들어지는 게 아님을, 편안하고 한가로운 골목을 걸으며 새삼 떠올렸다.


도쿄 시부야-긴자 인근 골목길 풍경
도로 위 사인은 시인성 좋도록 선명하게. 내리막 보도는 자전거/스쿠터가 속도를 내지 못하게 장애물을 설치해 놓았다.
통학로에는 '문'이라고 사인을 통일했고, 골목마다 빼곡한 주차장에는 비었다, 찼다를 직관적 네온사인으로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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